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자는 여완(汝完), 호는 죽남이며 본관은 동복(同福)이다.
부친은 이조참판을 지낸 오백령이다.
1618년 31살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주로 외직으로 부평부사, 연안부사, 나주목사, 경기감사를 역임했다. 이후 내직의 한성부판윤, 에조판서, 대사헌,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오준은 문장을 최립에게 배웠으며 글씨는 한호에게 익혔다. 문장과 글씨에 능해 국가적 행사의 서사(書寫)를 많이 맡았고 서장관을 여러 번 지냈다. 1627년 원묘 이전 때 지석을 쓴 것을 시작으로 1649년 장릉 지석을 써서 장헌대부에 올랐다.
1639년 52살에 주청부사로 중국에 간 것을 시작으로 이후 4번 중국을 다녀왔다.
한호에게 글씨를 배워 석봉체의 대가로 불리웠다. 중국 사신이 명필을 요구할 때마다 오준의 글씨를 얻어갔다는 실록 기록이 있다. 석봉과 비교해 짜임새가 좀 풀리고 신기(神氣)가 덜하다는 평도 들었다.
1639년 인조가 청에 항복한 뒤 서자관으로 <삼전도비명>을 쓴 뒤 이를 평생 한으로 여겼다. 일본 닛코사(日光寺)에 <일광산조선등로명(日光山朝鮮燈爐銘)> 글씨가 전한다.
[자료 1]
오언시: 42.5x82cm(서울옥션 제공)
해석
祥烏鳴曉色
宮柳弄春晴
搜句慵游冶
朝朝倚畫楹 藏鴉柳
상서로운 까마귀 새벽빛에 지저귀고,
궁궐 버들은 봄빛을 농한다.
싯귀 찾느라 노니는 것에 게을러,
매일 채색 기둥 기대고 지낸다. 「장아류(藏鴉柳)」
(번역: 김규선 선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