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여경(餘慶), 호는 남창이다.
23살 때인 156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벼슬은 교서관 정자, 봉상시 주부, 양주 목사 등을 거쳐 동지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다섯 살때『소학』을 읽었으며 15살 무렵에는 제자백가에 통달하였다. 집이 가난하였으나 몸가짐이 올발랐으며 우애와 효성이 지극했다.
글씨는 당시 경향이던 조맹부 서체를 섭렵한 위에 왕희지 영향도 받아들였다. 특히 해서에 능해 당시 여러 비문의 글을 썼다. 행주산성의 권율장군 대첩의 뒷면 음기(陰記)를 비롯해이순신 장군의 이충무공대첩비문을 쓰기도 했다.
[자료 1]
자작 시고: 31x21.5cm(서울옥션 제공, 오세창 구장품)
「贈慰李仲祐羈憂」
人生何用苦傷神 遇事當知自反身 往日少譽寧有害 今朝多謗亦非眞
誰憐時尙方遺老 祗惜交情更取新 白首鮑兄惟識我 幽明無負脂淸旻
(파초: 김규선 선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