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의 시인으로 이름높다. 본관은 해주이며 자는 가운(嘉雲) 호는 고죽(孤竹)이다.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나 동시대 시인으로 이름을 나란히 했던 백광훈(白光勳 1537-1582)과 함께 양응정 문하에서 수학했다.
30살(1568)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병조 원외랑을 거처 사간원 정언에 올랐으나 38살(1576) 때 영광 군수로 좌천된 이후 불운에 시달렸다.
그는 학문과 문장에 능해 이이(李珥 1536-1584),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최립(崔岦 1539-1612) 등과 교류했으며 백광훈, 이달(李達 1539-1612)과 나란히 삼당(三唐)시인으로 손꼽혔다.
[자료 1]
자작 시고: 25x45cm(서울옥션 제공)
(마지막에 보이는 칠언절구는 『고죽유고』에 실려 있는 시 「규사(閨思)」)
규사(閨思)
簾幕深沉隱曉光。五更殘夢到遼陽。孤鸎却喚淸愁去。輕霧霏霏濕海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