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전통예술세계를 서화(書畵)라고 부릅니다. 서예는 이렇듯 조선 시대에 회화 다음으로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주요 서예가들에 대해 인물 행적, 글씨 특징, 원본 자료 등을 소개해 미지의 영역에 머물고 있는 조선시대 서예 세계를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이 글에 관련된 각종 해설, 해제, 자료 제공은 단옥션 김영복 대표, 선문대학교 김규선 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이동국 부장, 미술사가 황정수씨 그리고 서울 옥션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국역 근역서화징』(한국미술연구소기획, 시공사간행),『한국역대서화가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간행)을 기본 참고자료로 삼았음을 밝힙니다.
자는 중옥(仲玉)이며 호는 청송(聽松) 이외에 죽우당(竹雨堂), 파산청은(坡山淸隱), 우계한민(牛溪閒民) 등을 썼다.
조광조의 문화에서 공부해 기묘사화 때 조광조가 처형되자 벼슬길을 포기하고 백악산(白岳山: 북악산을 가리키는 말) 아래의 집 정원 북쪽에 서실을 마련하고 ‘청송’이란 편액을 내걸고 은거하며 이를 자기의 호로 삼았다.
이후 여러 차례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한번도 출사하지 않고 처가가 있는 파평산(坡平山)으로 들어가 우계(牛溪)에 죽우당(竹友堂)을 짓고 생활했다. 이때 파산청은(坡山淸隱), 우계한민(牛溪閒民), 죽우당이라 호를 쓰기도 했다.
슬하의 1남1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조선중기 문신이자 학자로 유명한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이다.
그는 16세기를 대표하는 명필로서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그를 가리켜 ‘그의 필법은 곱고 예쁜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기고(奇古)하고 노창(老蒼)한 것을 위주로 했다’고 평했다.
또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은 ‘청송의 글씨는 세상 사람들이 보배로 여긴다. 그러므로 글씨를 소장하는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지 못하면 그 서첩의 맨 앞을 장식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청송 글씨의 뿌리는 조선 초에 유행한 조맹부(趙孟頫 1254-1322) 서체에서 출발했으나 원나라 선우추(鮮于樞 1246-1302), 명 문징명(文徵明1470-1559)의 영향을 받으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자료 1]
서간: 16x22cm, 서울옥션 제공
(해제)
答渾
汝網巾盡破在順/川者令奴子持來/耶. 示及. 父
혼에게 답함.
순천에 있는 너의 닳은 망건을 종에게 가져오게 했느냐? 보여주려무나. 아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