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해석>
皮封 : 慈山 政座 / 謹謝上 伏承 惠書 謹審殘沍 視政起居萬重 慰良深 年底邑務 無別關惱否 ②敦仁 以此癃廢 又冒重 任 僨敗之懼 只自靡措 耳 諸種 奇(寄)惠 多荷記存 不勝珍 謝 ③ 餘姑不備 謝上 |
피봉(皮封) : 수신 : 慈山 政座 발신 : 謹謝上 ① 해가 장차 끝나려 하니 멀리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합니다. 보내주신 서찰(書札)을 받고서 남은 섣달 추위에 정사(政事)를 보시는 생활이 여러 가지로 보중(保重)하심을 알았으니, 참으로 깊은 위안이 됩니다. 연말에 고을의 업무는 달리 고민거리가 없으신지요? ② 저는 이렇게 나른하여 몹쓸 몸으로 또 중임을 무릅썼으니, 일을 망칠까 하는 두려움에 그저 스스로 몸 둘 데 없을 뿐입니다. 보내주신 여러 물건들은, 저를 기억하고 생각해주시는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깊이 감사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③ 나머지는 잠시 예를 갖추지 못하고, 답장 올립니다. ④ 정미년(1847) 납월(臘月) 19일에 권돈인(權敦仁) 드림 |
<풀이>
<참고인물>
<난해한 초서>
1847년(헌종 13) 12월 19일에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가 자산 부사(慈山府使)로 있으면서 연말을 맞아 선물을 보낸 데 대해, 권돈인(權敦仁)이 고마움을 표시한 내용을 담은 서간(書簡)이다. 발신자는 당시 56세였고, 수신자는 당시 65세로 영의정(領議政)에 제수되었다.
한해가 끝나려는 즈음에 멀리서 그리움이 절실한데 서찰을 받고 얼마 남지 않은 추위에 정사(政事)보시는 형편을 물었다. 자신은 병이 심한데 또 중임을 맡아 넘어질까 두렵지만 조치할 바를 모르겠다고 하였다. 여러 가지 보내준 물건은 감사히 잘 받았다고 하였다.
응와(凝窩)는 1846년, 선생의 나이 55세 되던 해 7월에 자산 부사(慈山府使)를 배명(拜命)하고 부임하는데, 조카 진상(震相)이 따라갔다. 가는 길에 황주(黃州)의 월파루(月波樓)에 오르고, 평양(平壤)에 이르러 연광정(練光亭)과 부벽루(浮碧樓)를 두루 돌아보고, 기자묘(箕子廟)를 배알하고 정전법(井田法)을 시행하였던 유지(遺址)를 찾아보고, 8월에 자산부(慈山府)에 도착하였다.
잔호(殘沍) : 남은 섣달의 추위.
시정(視政) : 정무(政務)를 살펴 봄. 한유(韓愈)의 〈쟁신론(爭臣論)〉에 “정치의 득실을 보기를 마치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의 살찌고 파리함을 보듯이 하여 조금도 마음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視政之得失 若越人視秦人之肥瘠 忽焉不加喜戚於其心〕”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자산(慈山) : 평안도에 속한 지명.
<참고인물>
권돈인(權敦仁, 1783~1859) :
선비화가로 자는 경의(景羲), 호는 이재(彛齋), 과지초당로인 (瓜地草堂老人)이라 하였다. 벼슬은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쳐 184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으며, 서예에 능하여 ‘노건(老健)한 바는 자하(紫霞)보다 낫다’는 평까지 받았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와 가까이 지냈고, 그림에 대한 안목이 당대에 널리 인정받았다.
《세한도(歲寒圖)》란 《논어(論語)》의 ‘날이 차가워진 후에야 비로소 소나무 잣나무가 마지막으로 잎이 지는 것임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어떤 역경에 처해도 변함없는 선비의 지조에 비유된다. 그러나 권돈인의 세한도는 화폭 안에 밝힌 대로《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를 그린 것이다. 따라서 송백(松柏)이 아닌 송죽매(松竹梅)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두 소재는 결국 선비의 지조를 토로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한 것으로 그 간략한 구성에서는 산수화의 의미보다 오히려 서법(書法)에서 보는 필의(筆意)와 개성을 먼저 찾게 된다.
김정희의《세한도》는 갈필(渴筆)의 차갑고 싸늘한 멋이 풍기는 반면에, 권돈인의 경우는 윤묵(潤墨)의 점들이 강한 악센트를 주고 있다. 그것은 김정희와 다른 권돈인의 온후한 성품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재 권돈인 필 세한도
① 해가 장차 끝나려 하니 멀리서 그리움이 더욱 간절합니다. 보내주신 서찰(書札)을 받고서 남은 섣달 추위에 정사(政事)를 보시는 생활이 여러 가지로 보중(保重)하심을 알았으니, 참으로 깊은 위안이 됩니다. 연말에 고을의 업무는 달리 고민거리가 없으신지요?
② 저는 이렇게 나른하여 몹쓸 몸으로 또 중임을 무릅썼으니, 일을 망칠까 하는 두려움에 그저 스스로 몸 둘 데 없을 뿐입니다. 보내주신 여러 물건들은, 저를 기억하고 생각해주시는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깊이 감사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② 저는 이렇게 나른하여 몹쓸 몸으로 또 중임을 무릅썼으니, 일을 망칠까 하는 두려움에 그저 스스로 몸 둘 데 없을 뿐입니다. 보내주신 여러 물건들은, 저를 기억하고 생각해주시는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깊이 감사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③ 나머지는 잠시 예를 갖추지 못하고, 답장 올립니다.
④ 정미년(1847) 납월(臘月) 19일에 권돈인(權敦仁) 드림
關-5행
왕탁(王鐸) 황정견(黃庭堅) 모택동(毛澤東)
措-7행
초서운회(草書韻會) 왕헌지(王獻之) 손과정(孫過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