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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서간찰읽기 12. 요사이 불꽃 더위 속에 편안하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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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정조(正祖)가 홍용한(洪龍漢)에게 보낸 서간(書簡)



<전문 해석>


 皮封 :  長川  執事 

① 近日烘炎 
動靜萬重

② 慶辰饌品 今日始略備 與樊
汶諸公團會 而
執事不與焉 

③ 別盛一榼 玆以
奉呈耳 不備 
               卽  欠拜 

④ 瓊玉膏 頃有奉問 何
無的敎 當送之耶

피봉(皮封) : 장천 집사(長川  執事) 

① 요사이 불꽃 더위 속에 편안하신지요.

② 경신(慶辰) 찬품(饌品)을 오늘 비로소 대략 준비하여 번문 제공(樊汶諸公)과 단란하게 모였는데, 집사(執事)께서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③ 따로 한 합(榼)에 담아서 올립니다. 이만 그칩니다.          
   즉일에  서명(署名)은 생략하고 올립니다.    


④ 경옥고(瓊玉膏)는 근래 받들어 물은 적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정확한 말씀이 없는지요, 보내드릴까요?



<풀이>
기미년(1799, 정조 23) 4월 9일에 정조(正祖, 1752~1800)가 홍용한(洪龍漢, 1734∼미상)에게 보낸 짤막한 서간이다. 
무더운 날씨에 안부를 여쭙고, 경신(慶辰)에 찬품(饌品)이 오늘 대략 구비되어 번암(樊巖:蔡濟恭)과 다른 분들은 단란하게 모였는데, 집사(執事:홍용한)께서 참여하지 않아 별도로 한 합(榼)을 담아서 보낸다는 내용이다. 신하를 위하는 따스한 인정이 느껴지는 사연이다. 
끝에 한 단 내려쓴 ④는 앞에서 말하지 않았던 내용을 언급한 추기(追記)이다. 
피봉에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는 묵인(墨印)이 찍혀 있다. 

왕이 신하에게 내린 서간에는 일자와 발신자를 적지 않는 것이 상례이다. 정조가 홍용한(洪龍漢)에게 보낸 서찰을 모아 만든 이 서첩의 앞쪽에 배치된 서찰에 “기미년 등석 다음 날 아침[己未燈夕翌朝]”라 적었기 때문에 이는 1799년(정조 23) 4월 9일 이후에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등석(燈夕)’은 관등절(觀燈節)날 저녁을 가리키니, 초파일(初八日)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용어 및 지명>
장천(長川) 집사(執事) : 수신자인 홍용한(洪龍漢)을 지칭한다. 
경신(慶辰) : 탄일(誕日)을 뜻한다. 정조의 생신은 9월 22일이고, 모친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8월 6일이다. 
찬품(饌品) : 음식. 
번문 제공(樊汶諸公) :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다른 분들인데, 문(汶)은 미상이다. 
즉(卽) : 상대의 서찰을 받고 즉시 답장을 쓸 경우에 사용한다. 
흠배(欠拜) : 발신자의 서명(署名)은 생략하고 올린다는 뜻이다. 서간은 서로 잘 아는 사이에 주고받을 경우에 자신의 서명을 생략하기도 한다. 
경옥고(瓊玉膏) : 중국 송(宋)나라때 홍준(洪遵)이란 의사가 자신의 경험과 전해들은 처방들을 한데 묶어 정리한 홍씨집험방(洪氏集驗方)이란 책에 가장 먼저 등장한다. 원래 폐(肺)에 화열(火熱)이 있는 까닭에 폐의 진액(津液)이 부족해져 발생하는 마른기침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처방이다. 즉 진액을 보충해 주는 생지황, 건조해진 폐를 촉촉이 적셔주는 꿀, 허약해진 폐의 기운을 북돋는 인삼, 폐의 화열을 없애주는 복령 이 4가지 약물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폐열로 인한 가래없는 기침의 치료에 목표를 둔 것이다.

<참고인물>
정조(正祖, 1752~1800)는 재위 1776∼1800.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10세에 요절한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했다. 1775년부터 1776년까지 할아버지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였다. 1776년부터 1800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776년부터 1780년까지 홍국영(洪國榮)이 실권을 잡았고 홍국영을 축출한 해인 1780년부터 1800년 붕어(崩御)할 때까지 친정(親政)을 하였다. 
즉위 후 정약용(丁若鏞), 채제공(蔡濟恭), 안정복(安鼎福) 등을 등용,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과 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였으나 한편으로 노론의 원칙론자인 스승 김종수(金鍾秀)와, 이미 사망한 유척기(兪拓基)의 문하생들을 각별히 중용하였으며,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된 노론벽파와의 정치적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노론벽파의 일원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는 등 복잡한 측면이 있다. 또한 홍국영(洪國榮)의 기용 이후, 특별히 중용한 측근 가신에 의해 정사가 좌우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을 남기기도 한다. 
재위기간 중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서예에도 능했고, 그림에도 능하여 필국화도, 매화도 등을 남기기도 했다. 박지원(朴趾源) 등의 격식에 구애받지 않는 문장에 반대하였다. 

홍용한(洪龍漢, 1734∼미상)은 조선 후기 문신(文臣)으로 자는 명여(明汝),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의 5세손으로, 증조는 홍만용(洪萬容)이고, 조부는 홍중기(洪重箕)이다. 부친 수재(守齋) 홍현보(洪鉉輔)와 모친 이세박(李世璞)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으로 좌의정 홍인한(洪麟漢)·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이 있다. 
1765년(영조 41) 식년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후 정언·부수찬·부교리·부수찬·겸사서·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770년(영조 46) 낭청으로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편집에 참여하였다. 1772년(영조 48) 이후 승지·의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776년(영조 52) 정조가 즉위하자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洪麟漢) 일당에 대한 처벌이 논의되었을 때 연루자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았으나 곧 서용(敍用)되었다. 1794년(정조 18)부터 동지돈령부사·종척집사(宗戚執事) 등을 역임하였다.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이다. 영조대의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 사도세자의 신원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대상인의 특권을 폐지하고 소상인의 활동 자유를 늘리는 조치인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주도하였다. 
 


① 요사이 불꽃 더위 속에 편안하신지요. 



② 경신(慶辰) 찬품(饌品)을 오늘 비로소 대략 준비하여 번문 제공(樊汶諸公)과 단란하게 모였는데, 
집사(執事)께서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③ 따로 한 합(榼)에 담아서 올립니다. 이만 그칩니다.          
즉일에  서명(署名)은 생략하고 올립니다.


④ 경옥고(瓊玉膏)는 근래 받들어 물은 적이 있는데도 어찌하여 정확한 말씀이 없는지요, 보내드릴까요?


 

<난해한 초서>

  靜 - 2행 
  육거인陸居仁   문정명文征明   왕희지王羲之

  品 - 3행  
황정견黃庭堅   미불米芾   경세강敬世江

글/ 무불거사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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