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每因팽使之來到 |
①매번 심부름꾼을 귀댁(貴宅)에 오도록 하여 안부를 들었으나 아직 능히 서독(書牘)으로써 소식을 여쭙지 못하여 항상 서운하고도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겨울 추위에 부모님을 모시는 나머지에 기거가 한결같이 호위되는지요?
임인년(1842) 12월 초2일 족종(族從) 원준(源準) 드림 |
<풀이>
1842년(헌종8) 대포(大浦)에 사는 원준(源準)이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재직 중인 집안 형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수신자 이원조는 지난 3회 간찰의 수신자였던 강릉부사와 같은 사람이다.
자신의 안부와 아울러 딸을 얻은 소식 등을 전하고, 수신자가 1842년에 편찬한 <대정군 읍지(大靜郡邑誌)>를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이는 자신이 제주도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뜻을 넌지시 전하는 것이다.
피봉에 표시된 책실(冊室)은 고을 수령의 곁에서 잡무를 맡아보던 비서를 지칭한다.
이원준(李源準)
수신자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2)의 집안 아우이다. 이름은 준경(準卿), 호(號)는 심서(心墅)이다. 응와가 그를 위하여 지은 만사가 《응와집(凝窩集)》 3권에 <만족제준경[원준](輓族弟準卿[源準])>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원조(李源祚) 1792(정조 16)∼1872(고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영조(永祚),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형진(亨鎭)의 아들이며, 정언 규진(奎鎭)에게 입양되었다. 1809년(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정언으로서 기강이 문란하여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계속된 흉년으로 민중들의 간고(艱苦)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들어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극간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