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게 한 부분은 편지지 여백을 이용해 쓴 서간 후반부임을 참조)
전문해석
①殘景冉冉 翹誦殷殷 卽伏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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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남은 햇살이 느릿한데 발돋움하며 그리는 마음 은은한데, 곧 금옥(金玉) 같은 당신의 소식을 받고 삼가 섣달 추위에 정무(政務)를 보시는 형의 체도(體度)가 편안하심을 알았으니, 간절히 축하함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②오랫동안 폐단이 누적된 형국(形局)에 비록 다행히 풍년이 들었으나 세금을 독촉해야 하는 정사(政事)로 매우 신경이 쓰이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강릉의 백성들은 형을 태수로 모신 것은 이는 매우 두터운 복을 받은 것이니, 울다가 웃게 되어 다시 새봄을 보게 되었으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③다만 관리가 관름(官凜:정부 돈)을 포탈(逋脫)한 것을 대신 징수(徵收)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처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으나 관리가 된 자는 곤란함이 없겠습니까? 4백 수량을 언제 발송해야 하지 모르겠는데 아직 와서 납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머지 수량을 올해 뒤로 미루는 것도 일의 형세로 보아 그렇게 하지 아니 할 수 없습니다. ④그러나 당년에 각 항목의 납부해야 할 것이 1만 냥에 가까운 것을 아직 다 징수하지 않았으니, 이렇다면 계속 수송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세전에 죄(罪)를 심리(審理)하여 처단(處斷)하고, 혹 해를 넘기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천만번 바라고 바랍니다. ⑤저는 겨울 초에 성묘(省墓)를 하고, 지난달에 부모님 산소를 이장(移葬)하고 그믐이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습니다. 피로가 쌓인 데다가 감기까지 들어 열흘 동안 녹초가 되었으니 그 고통을 말로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보내 주신 여러 가지 물건은 삼가 정답게 기억해줌을 입었으니, 매우 감사함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⑥나머지는 베개에 엎드려 간신히 쓰느라 답장의 예를 다하지 못합니다. 경자년(1840) 12월 15일 아우 돈인(敦仁) 올림 |
<풀이>
1840년(헌종 6) 12월 15일 권돈인(權敦仁)이 당시 강릉부사로 재직하던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에게 보낸 서간이다.
오랫동안 폐단이 쌓인 형국(形局)에 비록 다행히 풍년이 들었으나 세금을 독촉해야 하는 정사(政事)로 매우 신경이 쓰이리라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강릉의 백성들은 수신자를 태수가 모시게 되어 매우 두터운 복을 받아 처음에는 울다가 나중에 웃게 되었다고 하였다.
다만 관리가 관름(官凜:정부 돈)을 포탈한 것을 대신 징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처에서 나온 것임을 알겠으나 관리가 된 자는 곤란함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반드시 세전(歲前)에 관리의 죄(罪)를 심리(審理)하여 처단(處斷)하고, 혹 해를 넘기 않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본인은 겨울 초에 성묘(省墓)를 하고, 지난달에 부모님 산소를 이장(移葬)하고 그믐이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조선 후기 관리들이 연말에 정무(政務)를 주제로 교환했던 서간의 전범을 보여준 자료라고 하겠다.
권돈인(權敦仁) 1783년(정조 7)∼1859년(철종 10)
조선 말기의 문인·서화가. 본관은 안동. 자는 경희(景羲), 호는 이재(?齋)·우랑(又?)·우염(又髥)·번상촌장(樊上村庄) 또는 과지초당노인(瓜地草堂老人). 우의정을 지낸 상하(尙夏)의 5대손이며, 군수를 지낸 중집(中緝)의 아들이다. 1813년(순조 13)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정자와 헌납을 거쳐, 1819년과 1835년(헌종 2)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과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판서와 우의정·좌의정 등을 역임한 뒤 184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1851년 철종의 증조인 진종(眞宗)의 조천례(?遷禮)에 관한 주청으로 인해 파직당하고 순흥으로 유배되었다. 1859년 연산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그곳에서 76세로 일생을 마쳤다. 서화에 능하여 일생을 친밀히 지냈던 김정희(金正喜)로부터 뜻과 생각이 뛰어났다는 평을 들었으며, 예서체(隷書體)비문에 관해서는 ‘동국(東國)에 일찍이 없었던 신합(神合)의 경지’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의 서화를 구득하면 김정희와 연구하여 감식안을 높이기도 하였다. 유작으로 〈세한도 歲寒圖〉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김정희의 〈세한도〉와 화풍상 밀접한 관계를 보이고 있다. 김정희의 〈세한도〉가 갈필(渴筆)로 다루어져 싸늘한 느낌을 자아내는 데 비하여, 그의 〈세한도〉는 윤필(潤筆)로 처리되어 보다 안온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간명한 구도라든가 넘치듯 배어 있는 농축된 문기(文氣) 등은 사의(寫意)를 지향하는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크게 진작시켰던 김정희의 화풍과 상통된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이원조(李源祚) 1792(정조 16)∼1872(고종 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영조(永祚),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형진(亨鎭)의 아들이며, 정언 규진(奎鎭)에게 입양되었다. 1809년(순조 9)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7년(헌종 3) 정언으로서 기강이 문란하여져 사족(士族)들의 사치가 극도에 달하였으며, 이와는 달리 계속된 흉년으로 민중들의 간고(艱苦)가 형언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들어 쇄신책을 실시할 것을 극간하였다. 1850년(철종 1) 경주부윤에 오르고, 1854년 대사간에 이어 공조판서를 지냈다.
필자: 무불거사(無不居士). 초서간찰을 비롯한 한자를 연구하는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