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정구는 어떤 그림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한가할 때 가끔 한 번씩 열어보노라면 내 몸이 외진 조선 땅, 사백 년 뒤에 살고 있다는 현실을 잊어버리게 된다. 저 사백 년 전 매일 주자 선생을 모시고 도(道)를 강론하면서 이곳에서 노래부르며 생활하던 사람들의 그 기상과 흥취는 과연 어떠하였으리오!”
주자가 만년에 제자들을 거느리고 살던 장소를 그린, 주자 선생을 흠모하는 마음으로 조선 중기에 많이 그려졌던 이 그림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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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위 그림은 이성길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1592, 견본담채, 33.5×398.5㎝, 국립중앙박물관) 부분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대의 학자 주희(朱熹, 1130~1200)는 긴 세월 동아시아의 수많은 학자들에게 존경받으며 ‘주자’라고 칭해졌다. 고려시대 알려진 이래 조선시대 학자들은 한결같이 주자라고 부르며 최고의 학자로 추앙했다. 주자의 사상을 따르는 주자학은 물론 지나치게 따른 데 대한 부작용으로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까지도 조선의 중심의 중심에 있던 철학이자 학문이었다.
주자 철학이 심화되던 16세기, 주자가 살며 노닐었던 곳을 시로 읊거나 그림으로 그려 감상하는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산에 오를 때도 주자의 시문집을 소맷자락에 넣고 읊조리며 올랐다고 한다.
주자 철학이 심화되던 16세기, 주자가 살며 노닐었던 곳을 시로 읊거나 그림으로 그려 감상하는 문화가 크게 유행했다. 산에 오를 때도 주자의 시문집을 소맷자락에 넣고 읊조리며 올랐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주자가 만년에 제자들과 함께 살면서 강론하고 시를 읊고 노닐던 무이산(武夷山) 아홉골짜기, 무이구곡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주희는 1183년 무이구곡의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이듬해 「무이도가(武夷櫂歌)」(무이구곡도가武夷九曲櫂歌) 10수의 시를 썼다.) 무이구곡도는 원래 중국 복건성 숭안현 무이산 계곡의 실경을 그린 그림이었을 테지만 주자의 무이도가에 대한 감흥을 더하고 성리학적 내용을 담은 관념적 산수화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조선에서 무이구곡도는 15세기 서거정의 글에 처음 등장했고 그 이후 16세기에 널리 유행하는 그림이 되었던 것 같다.
16세기에 살았던 대학자 퇴계 이황은 자신의 눈으로 많은 무이도를 보았다고 했으며, 정구의 예처럼 당시 문인들이 남긴 문집에도 무이구곡도에 대한 감상문이 적잖이 실려 있다. 주자학에 심취했던, 주자를 흠모했던 조선의 문인들은 무이구곡도를 보면서 시간과 공간의 갭을 뛰어넘어 주자 선생을 모시며 자연 속에서 사는 제자에게 자신을 이입하며 꿈꿨던 것이다.
* 주자를 따라서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세우고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은 도산에 은거하면서 「도산십이곡」을 지었으며, 작품의 표현 방식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나타난다고 한다.
조선의 거의 전 시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무이구곡도는 이성길 명작 외에 여러 그림들이 전해진다. 이담(1510∼1577)은 자기 집에 전해져 내려오는 중국본 ‘무이구곡도’를 베껴 그린 다음 이를 퇴계 선생에게 보여주면서 글을 부탁한 적이 있다. 퇴계 선생이 이를 보고 감동하자 그는 한 부를 더 그려 스승에게 드렸다고 한다. 퇴계 선생이 당시에 받았던 그림은 현재 영남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강세황의 무이구곡도는 스승인 실학자 성호 이익의 지시로 그린 것인데 지도에 가까운 그림이다. 이익은 강세황에게 퇴계 선생이 살았던 도산서원 일대도 그리라고 했다.
무이산을 직접 가 볼 수 없음을 탄식하고, 무이산의 풍물과 역사, 시문이 수록된 무이지를 탐독하고, 시를 외우고, 그림으로 그리고 감상하고... 요즘의 소위 '덕질'에 다름 아닌 것 같다.
`무이구곡도` 부분, 무이정사와 나한동(羅漢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