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레데릭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가 1870년에 자신의 작업실을 그린 작품이다. 당시 바티뇰 지구 콩다민 거리에 있던 그의 작업실에는 노상 친구들이 들락거렸다. 대개는 당시 아직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던 인상주의 화가와 예술가들이다.
장 프레데릭 바지유 <콩다민가 작업실Studio of rue de la Condamine> 1869-1870, 98x128cm, 캔버스에 유채, 오르세미술관
이 그림은 바지유가 그린 것이지만 캔버스 앞에 서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은 다른 화가가 그려준 것이다.
이 그림 안에 들어 있는 실존인물 중 하나인, 바지유의 모습을 그려 넣어 준 화가는 누구일까?
1) 모네 2) 마네 3) 피사로 4) 르누아르 5)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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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바지유와 친하게 지내던 인상주의 화가 대부분은 아직 가난해서 제대로 된 화실이 없거나, 낡고 좁은 곳을 사용하던 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바지유는 집안이 넉넉해서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에 쾌적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마음이 넉넉했던 그는 초기 인상주의가 일어날 무렵에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작업실을 빌려주거나 재료를 지원해주거나 그림을 사 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
바지유의 작업실은 자연스레 다른 화가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기 때문에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상주의 화가들, 그 친구 실제 인물들이다.
가운데에 그림 앞에 팔레트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바지유이고, 캔버스 왼쪽에서 그림을 보고 토론하는 듯한 두 사람은 마네와 모네, 오른쪽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은 바지유의 절친 에드먼드 메이트르Maître, 계단 아래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르누아르, 계단 위는 자카리 아스트뤽Astruc일 것으로 추정되는데 에밀 졸라라는 주장도 있다. 다 추정이기는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림에 대해 선생님이 가르쳐 주듯 약간은 권위적 태도로 지적 중인 이는 분명히 마네이다. 화가의 모습을 그려준 이도 마네. 바지유는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린 사람이 (그림 속에서 모자를 쓴 사람인) 마네라고 밝혔다. 그가 마네를 존경했음이 드러난다. (정답은 2)번)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들 모임에서 좌장 같은 느낌이었다.
왼쪽부터 모네, 마네, 바지유
모네의 정물화와 메이트르
르누아르
장 프레데릭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 1841–1870)는 몽펠리에의 부유한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가 되기 위해 파리로 왔다. 의학 공부와 그림 공부를 병행하던 그는 르누아르, 시슬리 등의 화가와 친해지게 됐고, 1864년 의사 시험에 실패하면서 전업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모네, 마네와도 친분을 쌓게 됐다. 1865년에는 모네와 작업실을 함께 썼고 모네의 작품 몇 개를 구입해 주기도 했다. 이후 콩다망 9번지 작업실을 빌려 르누아르와 공유하면서 피사로, 세잔, 쿠르베, 드가 등도 방문했다. 주로 르누아르, 모네, 마네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바지유가 그린 이 그림이 덕에 우리는 이 시대 파리의 미술사 한 장면을 우리가 엿볼 수 있게 됐다. 마네와 모네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는 바지유의 모습,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시간을 보내던 화가와 친구들의 모습으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벽면에는 바지유의 잘 알려진 작품 두 점이 있고, 르누아르의 <두 사람이 있는 풍경>이 걸린 모습인데 당시 살롱전에서 거절된 이 그림들을 일부러 그려 넣어 그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다. 피아노 위의 작은 정물화는 모네의 것으로 아마도 바지유가 구입했던 작품일 것이다.
바지유의 그림 Fisherman with a Net이 인물 뒤 높은 벽에 걸려 있다.
바지유의 그림 The Toilette이 침대 위에 걸린 모습
그림 중 벽면에 르누아르의 그림 <두 사람이 있는 풍경>의 모습. 이 작품도 살롱전에서 탈락했다.
이 그림이 그려지고 나서 4년 정도 후인 1874년 모네,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모리조는 “익명의 화가조각가판화가협회(The Anonymous Society of Painters, Sculptors, and Printmakers)”를 조직하고 전시회 시리즈 시작했다. 30여 명의 작품을 선보이고 165점의 작품을 판매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바지유는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다. 그보다 이른 1870년, 이 작업실 그림이 그려진 해 그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고 그해 11월 28일 총에 맞아 전장에서 사망했다. 만 스물 아홉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다.
친구들은 바지유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이들은 그의 재능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피사로는 바지유에 대해 “우리 중 가장 재는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르누아르가 그린 바지유의 모습
바지유가 그린 르누아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