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들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일부이지만 파여진 구덩이의 모습이 보이고 이를 검은 옷을 입은 조문객과 사제가 둘러싸고 있어 장례 중 죽은 이를 매장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엄숙하고 장엄하게 연출된 화면에, 언뜻 보아서는 한 사제가 치켜든 십자가가 저 멀리 언덕 위쪽에 예수가 매달린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는 묘한 그림이다.
이 그림이 처음 관객들에게 보여졌을 때 큰 논란이 벌어졌다.
사람들을 놀라게 한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다음 중 무엇일까?
① 그림이 너무 컸기 때문에
② 너무 비싼 가격에 팔렸기 때문에
③ 그림을 그린 재료가 특이했기 때문에
④ 그림 속에 유명인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에
⑤ 시신을 매장하는 장면은 금기였기 때문에
------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1850년, 315×668cm, 캔버스에 유화, 파리 오르세미술관
1848년 9월,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고향인 오르낭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증조할아버지뻘 친척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이 때의 한 장면을 다음 해에 그려서 1850~51년의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다. 이때 화가의 나이는 31세. 이 그림은 비평가와 대중의 비난과 찬사를 받으며 논란의 중심에 서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이 작품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긴 점은 가로가 6미터 68센티미터에 이르는 대작인데 그 내용은 풍속화 같은 평범한 일상의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더 무의미해 보이는 것도 대형 화폭에 담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당시에 그런 대형 유화라면 당연히 신화라든가 종교적 성스러움을 담거나 영웅이 등장하는 등 전통적으로 사람들이 ‘우러러보아야 할 뭔가’를 담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그림 안에는 우러러볼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에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간 것이다. 이런 아무것도 아닌 내용을 이렇게 크게 그리다니. (답은 ①번)
또 하나의 놀라운 점은 평범하게 지방 장례식을 그렸지만 그나마도 장르화스러운 감상적인 표현도 없다는 것이었다. 슬픔이나 연극적인 제스처도 없고 사람들은 고상하게 표현되지도 않았다. 당시의 비평가들은 ‘고의로 추함을 추구했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실제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넣었다고 한다.
낭만주의 같은 호화로움이나 장식미, 퇴폐미 같은 것들에 길들여진 당시 사람들의 눈에 이러한 스케일의 이러한 사실적 표현은 다소 불편할지 모르나 참신함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쿠르베 본인은 이 그림에 대해 “오르낭의 매장은 실제로는 ‘낭만주의의 매장’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쿠르베가 추구했던 것을 사실주의라고 칭하는데, 이는 그림을 ‘사실과 똑같이’ 재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술의 존재 이유를 현실에 두고 실재하는 현실을 화가의 시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한다는 의미다. 그러다보니 동시대를 들여다보고 사회비판적 시각을 표현하게 되기 마련이다. 쿠르베 또한 그러한 길을 걸었다.
이 그림은 오르세미술관에 <화가의 작업실>과 마주보고 걸려 있는데, 파리 만국박람회가 있던 1855년 살롱전에 출품했다 거절당한 유명한 이 그림도 가로 598cm의 대작이다.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1855년, 359x598cm,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 Musée d'Orsay / Sophie Boegly-Crépy
박람회가 열리던 궁전 옆에 임시전시관을 짓고 ‘사실주의 전시’라고 명명해 자신의 리얼리즘 작품들을 전시했다. 이 그림에는 ‘나의 예술적 생애 7년에 걸친 시기를 정의하는 현실의 알레고리’ 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