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국 런던 왕립병원 의사인 그레이엄의 네 자녀를 그린 대형 초상화이다.
언뜻 보아도 부유한 집 아이들로, 배경도 그렇고 옷도 그렇게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자라고 있는 것만 같다. 밝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아이들은 건강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 그레이엄 가 아이들 그림이 완성되기 직전에 이들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① 경제적 몰락
② 어머니의 가출
③ 아이 한 명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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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 <그레이엄家의 아이들> 1742년, 캔버스에 유채, 160.5x181cm, 런던 내셔널갤러리
포근하고 따뜻한 가족의 초상이라기보다 부자연스럽게 단란한 태도나 생글생글한 미소에 위화감을 느꼈거나 연극적인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들었다면 그 이유는 충분하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풍자화로 유명한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로, 그는 연극무대처럼 화면을 꾸민 극적 회화와 판화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극작가처럼 주제를 다룬다. 나의 그림은 나의 무대이다."
가로 2미터에 이르는 집단 초상화를 주문한 그레이엄은 런던 왕립병원의 의사로, 당대 인기 화가에게 초상화를 의뢰할 정도로 재력이나 권력이 상당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 비싸 보이는 옷, 배경의 가구나 집안 인테리어도 최고급. 귀한 먹을거리로 장식된 그림인데, 맨 왼쪽 아래 여자아이의 옷을 입은 아이가 막내인 토마스 그레이엄, 즉 사내아이였다. 당시에는 서너살 까지 여자아이 옷을 입히는 경우가 많았다. 남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아들 둘 딸 둘을 얻은 행복한 아빠였지만, 어떤 연유였는지 토마스가 이 그림이 완성될 즈음에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답은 ③번.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그림을 보면, 그림 안에 죽음과 관계된 기이한 지물 등을 발견하게 되어 오싹해진다. 큰아들이 들고 있는 뮤직박스는 ‘악덕’을 의미하고, 새장안의 새는 ‘난봉꾼’을 의미하기도 하며, 아이가 탄 유모차에 달린 새도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두 소녀의 동작도 ‘허식’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메멘토모리 주제에 단골로 등장하는 낫을 든 천사가 좌측 상단의 시계에 장식되어 있어 사투르누스(크로노스)임을 알아볼 수도 있다.
모래시계는 유한한 시간, 죽음을 상징하며, 이렇게 보면 새장 속의 새를 노리고 있는 고양이의 표정도 악마의 것 같이 보인다. 죽음이 숨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려져 아이들의 웃음이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는 삽화, 풍자 화가로 당대에 크게 명성을 얻었다. 은세공 기술자에게 도제로 들어가 engraving, 판화 기술을 익히다가 20대 중반부터 그림 공부를 했다. 그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고, 돈을 많이 버는 역사화가가 되고 싶어했다. 결국 역사화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독창적인 방법으로 성공을 거뒀다. 던힐이라는 사람 밑에 들어가 그림을 배우다 곧 스승의 딸과 결혼도 하고, 스승에 이어 궁정화가가 되기도 한 것을 보면 처세에 강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처음에는 주문을 받아 초상화 같은 것을 그리다가, 시대를 풍자하고 도덕 윤리 주제를 담은 풍자화 연작을 그리고, 이것을 다시 판화로 대중에 유통시키면서 자신의 영역을 확고하게 닦았다. 그가 인기를 끌 수밖에 없던 것은 화면을 연극의 무대처럼 꾸며 보여주는 회화적 스타일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작품을 ‘내가 만든 무대“라고 부르고 등장인물을 ”무언극을 연기하는 배우“라고 불렀다.
그의 작품들은 방탕하게 살던 사람들의 몰락 과정을 그리는 교훈적인 연작물이 대표적인데 그 가운데 '매춘부의 편력'(1731~1732)과 '탕아의 편력'(1734)이 특히 인기가 있었고 판화로 많이 팔렸지만, 반면에 지나치게 많이 표절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본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저작권과 관련된 법을 만드는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1735년 노력 끝에 “호가스 법령”이라고도 부르는 ‘판화가의 저작권 법령’을 통과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