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주 드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는 17세기 프랑스 화가로, 그당시 유럽을 지배하던 매너리즘보다는 네덜란드 쪽이나 카라바조의 영향을 보이는 바로크 화가이다.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20세기 초에 재발견되어 현재도 나름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들은 종교적 명상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본질을 꿰뚫는 풍속화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그림은 그의 풍속화에 해당한다.
중앙 왼쪽에 거만하고 다소 불쾌한 듯한 표정으로 꼿꼿이 서 있는 젊은 남성이 보인다. 이들을 둘러싼 네 명의 여인이 심상치 않다. 바로 옆에는 정면을 향한 한 여인이 있는데 눈알만 왼쪽으로 돌려 젊은이를 주시하고 있고, 주름진 얼굴의 노파가 동전을 집어들며 젊은이의 눈길을 끄는 사이, 왼쪽 어떤 여인이 젊은이의 주머니를 슬쩍하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무엇일까?
① 사기꾼
② 소매치기
③ 점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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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주머니를 털리며 사기당하고 있는 젊은이를 그리고 있지만 이 사기꾼 그룹의 리더인 노파는 점쟁이다. 제목은 ③번 <점쟁이>.
* 조르주 드 라 투르 <점쟁이The Fortune-Teller> 1632-1635경, 캔버스에 유화, 102×123.5㎝,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노파가 그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추한 외모의 노파의 말을 한껏 무시하느라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르는 딱한 젊은이가 주인공이다. 이 노파는 미래를 알려주는 포춘 텔러. 아마도 젊은이에게 동전을 건네받으면서 그의 운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로 현혹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이 네깟 것들의 말에 뭐 속을 거 같으냐’ 같은 표정을 짓고 자신이 이들의 위에 서 있다고 착각하느라고, 젊은 남자는 주변의 도둑들을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 흰 얼굴의 젊은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녀의 성적 암시를 재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 투르는 이 작품처럼 카드놀이판 같은 곳에서 멍청하게 속고 있는 젊은 남자를 많이 그렸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풍속인물화인 것이다.
음침한 내용에 비해 컬러가 너무 산뜻해서 부조화를 이루는데, 드 라 투르의 어두운 종교화와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종교화 중 <참회하는 막달레나>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많은 유사한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이 그림 덕에 촛불의 화가라고도 불린다.
조르주 드 라 투르 <참회하는 막달레나Madalena penitente> 1640년경, 캔버스에 유화, 133.4×102.2cm,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제빵사 아들로 부유한 중산층 출신인 라 투르는 1617년 귀족의 딸과 결혼하여 아내의 고향인 뤼네빌에 공방을 설립했다. 공방의 성공적 운영으로 땅도 사고 돈도 벌었다. 1630년대 후반 쯤에 이르면 로렌 공작의 후원과 더불어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전쟁과 페스트가 로렌 공작령을 휩쓸고 뤼네빌은 혼란에 빠졌다. 라 투르는 전쟁을 피해 파리로 가서 루이 13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 루이 13세는 라 투르의 그림을 사랑해서, 《성 이렌느의 간호를 받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걸고 자신의 방에 있던 다른 그림을 모두 치우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풍속화든 종교화든 라 투르의 작품은 차분하고 단순화된 형태를 띄지만 세부의 표사는 치밀한 면도 있다. 빛의 사용이 능숙해서 푸생이나 로랭 등 당대의 다른 프랑스 화가들과 비교되기도 했다. 1643년 뤼네빌로 돌아온 뒤 1652년 유행성 출혈열로 숨졌다.
그가 종교화나 풍자적 그림을 탐구했던 것이 그의 인성을 바로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기록에는 부자였던 그가 고리대금업자로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고 하인들에게 도둑질을 시키는 등의 다양한 악행을 했다고도 전한다. 그가 20세기에 이를 때까지 잊혀져 있던 것은 파리를 떠났었기 때문일까? 전쟁 속에서 주요 작품들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들이 기억하기 싫어한 못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