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조선시대 18세기 후반의 그림입니다.
화면의 상단에는 넓은 다리 같은 곳 위에 천막이 쳐 있고 관료처럼 보이는 신하들이 가운데 상석을 향해 앉거나 서 있습니다. 이를 지키는 군사들도 보입니다.
다리 아래쪽에는 곳곳에 깃발이 꽂혀 있고 사람과 소가 짝을 이뤄서 써레질을 하고 있는 것 같고, 그 위쪽으로는 3인이 한 팀이 되어 줄을 매단 도구를 당겨 파내는 가래질을 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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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청계천입니다. 다리 위 천막 안에는 임금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빈 자리로 나타냈습니다. 다리 아래쪽의 사람들은 강물이 잘 흐르도록 바닥을 깊이 파내는 작업, 준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금이 직접 행차하여 참관할 만큼 중요한 일이었음을 할 수 있습니다.
돌다리 아래 개천에는 물이 별로 없는 듯 한데 좌우에 버드나무 등 여러 가지 나무 들이 서 있는 둑이 있어 강변임을 나타냈습니다. 둑 위에 상을 앞에 차리고 앉아 있는 인물들은 준천 장면을 지켜보는 선비들이겠지요. 소가 논을 갈 듯이 써레질을 하여 강바닥을 갈아엎으면 세 명이 한 조가 된 인부들은 가래질을 하여 흙을 퍼내는 분업화가 이뤄져 작업이 진행됐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한양이 수도 없이 찾아온 물난리를 막으려는 중요한 일인데, 담채와 가는 붓으로 인물과 배경을 표현하여 생동감있고 밝은 느낌의 그림이 되었습니다.
조선후기가 되면서 한양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됩니다. 지방에서 올라 온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래도 개천 주변으로 모여 빈민촌을 형성하게 되었겠지요. 이로 인해 청계천 등지에는 쓰레기가 쌓이고,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나무를 베어나간 산에서는 토사가 흘러내려 강 바닥이 점점 높아졌습니다. 시체를 종종 버리기도 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조금만 비가와도 범람하여 개천 주변 뿐만 아니라 한양 넓은 범위에 큰 피해를 끼쳤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초반에는 특히 한양에 홍수가 많이 났다는 기록도 찾을 수 있습니다.
<준천, 영조와 백성을 잇다> 도록 中. 청계천박물관
영조 임금(1724-1776)은 이러한 청계천 문제를 개천 바닥을 깊게 파는 준천 사업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준천을 반대하던 신하들도 있었던 모양인데 이를 끝내 관철하여 경진년(1760년)과 계사년(1773년)에 크게 두 번 준천 행사를 열었습니다.
경진 준천 때에는 흙을 걷어내고 배수구인 오간수문을 보수했고, 계사 준천 때에는 개천의 둑을 돌로 교체했습니다. 임금을 주고 고용한 인부들도 있었지만 백성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영조는 스스로 자신의 3대 업적을 꼽으면서 그 중 하나를 준천이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영조 이후에도 2~3년에 한 번씩은 준천이 지속적으로 실시되면서 개천 관리가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어전준천제명첩 부분(1760). 부산시립박물관
청계천 준천 그림은 버클리대학교가 소장한 『준천계첩』, 부산시립박물관의 『어전준천제명첩』, 규장각 『준천시사업무도』, 삼성미술관 리움 『준천첩』, 서울역사박물관 『준천첩』 등의 화첩 중에 들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영조가 오간수문에 친히 행차하여 준천의 현장을 관람한 "수문상친림관역도"에 해당합니다. 화첩마다 조금씩 제목과 포함된 장면은 다르지만 이밖에도 준천 완료 후 활쏘기 시합, 군병 격려 모습 등이 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