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764년 2월. 에도 인근의 절 세켄지淸見寺에 조선에서 온 통신사 일행이 방문했을 때 주지 간레이 슈닌關棙主忍은 다음과 같이 쓴 편지를 전달합니다.
조선국 삼사에 삼가 사룁니다. 담와 홍공(1748년에 정사로 왔던 홍계희)이 말씀하시길, “淸見寺는 우리나라 낙산사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동떨어져 그 승경을 볼 수 없음을 오래도록 한탄하였습니다. 지금 다행히 통신사행을 맞으니 그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엎드려 청하오니 휘하의 화사로 하여금 그 승경을 그리도록 명하여 귀로에서 줄 것을 허락하신다면 그림에서 옛말을 비춰보고 영원히 山門의 진귀한 보배로 삼겠습니다. 또한 오산창화집(鼇山唱和集)을 바쳐 이를 증명하오니 열람하시면 아실 것입니다. 별도로 반지(미농지) 6매를 부쳐 부디 바랄 따름입니다.
세켄지에 남아있는 이때의 기록 중 1764년 3월 20일 통신사절과 주지의 필담기(筆談記)에는 주지에게 “금강산도는 마땅히 화사에게 그리도록 대략 지시하였다(金剛山圖, 當爲師略略指示)”라고 하여 함께 수행한 화원에게 금강산도를 그리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세켄지에는 이 사람이 그린 6점의 작품 중 금강산도, 화조도, 매조도, 낙산사도의 4점이 남아 병풍으로 꾸며져 보관되고 있으며, 도화서 화원이었던 이 사람은 이 때의 사행에서 인기 폭발하여 수많은 그림 요청을 받았고, 현재도 일본에 여러 점 전하고 있습니다.
산수화조도압회첩병풍, 1764년, 지본수묵담채, 각 125.8×52.8cm, 세이켄지
수노인도, 견본수묵, 111.8×43.4cm, 료소쿠인
통신사 계미사행에서 활약했으나 국내에 남은 기록은 미미한, 이 화원 화가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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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김유성(金有聲, 1725-?)입니다. 호는 서암西巖.
조선시대에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행 중에는 도화서의 화원이 포함되었습니다. 활동에 제약이 많은 연행사행(중국으로 가는 외교사절단)에 비해 일본으로 가는 화원들은 좀더 뜨거운 호응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번주나 관백 앞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문인이나 화가와 교유도 꽤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임란 이후 총 12회에 걸쳐 이뤄졌던 조선의 통신사행 중에 11차인 1763년(계미년)의 통신사행에 김유성이 동참했습니다. 일행은 1763년 8월 3일 서울을 떠나 10월 6일 부산에서 배로 항해를 시작, 1764년 1월 21일 오사카 항구에 들어갔습니다. 교토를 경유하여 2월 16일 에도에 입성한 후 3월 11일 그곳을 떠나 7월 8일 경희궁에서 복명하기까지 총 332일 약 11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일본에 갔을 당시 그의 나이는 39-40세.
일본 문인 유구치 다메미쓰(湯口爲光)가 남긴 한객인상필화(韓客人相筆話)에서 그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객인상필화, 화원 김유성, 1764년, 25.1×17.2cm, 국립중앙도서관
다메미쓰는 그에게 “골격이 풍만하고 미간이 청수하며, 귀의 색깔은 밝고 윤기가 있어 부귀하고 이름을 높일 상이다. 다만 나이에 어두운 기운이 있어 반드시 병환이 있을 것이다” 했습니다. 이에 김유성은 “과연 지금 병이 있다. 언제 부귀를 얻고 언제 아들을 낳겠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다메미쓰는 “44세와 45세 때 기색이 열리면 길해질 것이다. 만약 부귀를 얻지 못하면, 훌륭한 아들을 얻을 것이다”라고 답했습니다. 몸이 조금 아프고 아들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한객인상필화에 실린 김유성 초상은 아베마키 마토(椿馬東)가 그린 것입니다.
김유성은 정3품까지 오른 화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행 외에는 뚜렷한 활동이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그의 작품은 계미사행의 수행화원으로 활동했던 1763년과 1764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김유성, 서지첩 1764년, 24.3×21.0cm, 개인
유해희섬도 지본수묵, 30×44.5cm, 개인
그는 주로 정사 조엄趙曮의 명에 따라 그림 그리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763년 11월 4일 쓰시마 세잔지(西山寺)에서 머물 때, 조엄은 쓰시마 도주가 관례로 서화와 마상재(말을 타고 기예하는 사람)를 보내주길 청하자 사자관, 마상재와 더불어 화원 김유성을 부중(府中)에 보내 응하도록 했고, 왜선 수백 척이 돛을 달고 지나는 낙조의 진경을 보고서 김유성에게 그리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유학자 나와 로도(那波魯堂)는 각지에서 김유성의 그림을 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기무라 겐카도는 조선통신사가 돌아간 후 겸가당갑신고를 엮으면서 화원 김유성에 대해 “조선의 김 화사는 솜씨가 뛰어나 장유할 때 춘운을 그려내면 산천의 기이함을 뽑아내었는데, 이는 붓끝을 벗어난 흥임을 알겠네”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에도에서 청나라 출신 화가 와타나베 겐타이(渡邊玄對)를 만났는데, 김유성은 그를 위해 산수화를 그려주었고, 이 산수화를 목판으로 모각하여 판화집으로 간행되기도 했습니다.
이밖에도 많은 일본의 엘리트들이 그를 중국 역대 유명 화가와 비유하는 등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세켄지 병풍에 남아 있는 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폭 금강산도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다 그릴 수 없고, 다 쓸 수도 없다. 갑신년 조선국 서암이 그리다(金剛山皆骨, 一萬二千峰未能盡畵 亦未能盡書, 甲申春朝鮮國西巖寫) [金有聲]”
제2폭 화조도, 제3폭 매조도 “갑신춘조선국서암사(甲申春朝鮮國西巖寫)[金有聲]”
제4폭 낙산사도 “낙산사, 갑신춘조선국서암사(洛山寺, 甲申春朝鮮國西巖寫) [金有聲]”
세켄지 소장 금강산도
참고논문
정은주, 「계미(1763) 통신사행의 화원(畵員) 활동 연구」, 『한국학』2011, vol. 34, no. 2, pp. 333-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