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데 산이 보이는 물가 언덕 아래 마을에 유난히 버드나무가 많습니다. 버드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마을에는 빼곡하게 농가의 지붕이 보이고, 밭매고 돌아오는 농부, 풀을 뜯다 쉬고 있는 소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그림은 조선시대 대 컬렉터 김광국의 『석농화원』에 실려 있던 18세기 화폭입니다.
단순한 구성, 푸른 선염으로 조금은 튀는 먼곳의 산, 둔탁하게 겹쳐지는 나무의 표현은 약간 어설픈 지점이 있어서 직업적인 화가가 집중해서 그렸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과 연관이 많은 한 인물의 괴석도 한 점도 석농화원에 나란히 실려 있었습니다.
괴석의 메마른 붓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안쪽은 청색과 갈색을 섞은 옅은 먹의 선염으로 채우고, 간간히 태점으로 바위에 붙은 이끼들을 표현하여 단조로움을 줄였습니다. 바위 양쪽으로 국화를 배치해 쓸쓸한 가을의 괴석의 모습임을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괴석의 기이한 형태와 단정한 채색으로 조화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두 그림 모두 선문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데, 이것이 각각의 그린 이가 전하는 그림으로 거의 유일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요?
힌트가 될지 모르지만 둘 중 한 사람은 여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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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그림은 ‘매주’라고 알려진 인물의 <유은촌사도>입니다.
매주梅廚 <유은촌사도 柳隱村舍圖> 18세기 후반, 지본담채, 23.7x17.2cm(畵)
<유은촌사도>, 측 버드나무에 숨겨진 시골집이라 이름붙여진 그림을 그린 매주는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다시피 여성입니다. 김광국의 제발에 따르면 김광국이 잘 알고 지내던 ‘허승’이라는 사람 집안에서 수놓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노비였다고 합니다. 자수를 잘 했던 것은 물론이고 산수화도 곧잘 그렸던 모양입니다. 그뿐 아니라 재주가 워낙 많아서 주인의 일을 많이 도왔다고 하는 것을 보면 타고난 손재주와 예술적 감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매주 김씨’라는 것 외에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림 솜씨를 알게 되었는지도 궁금하고 말이죠.
김광국은 (여자 노비가 이렇게 그리다니) “재주가 기이하지만 걱정과 탄식이 없을 수 없다”는 편견을 제발에서 드러내면서도 그녀의 그림을 모아 자신의 화첩의 한 쪽을 채우는 데는 고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괴석도를 그린 이는 이 김매주와 어떤 관계였을까요?
그린 이는 허승으로, 노비 매주가 일하던 집의 주인양반이었습니다.
허승許昇 <괴석추화도怪石秋花圖> 18세기 후반, 지본담채, 28.5x20.7cm(畵)
허승은 조선 후기에 활동한 화가로, 호는 진관자(眞觀子), 생애가 불확실합니다. 김광국은 허승이 여러 예술에 다재다능하여 명나라 때 화가인 구영(仇英)과 비슷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18세기 후반 문인 이영유가 허승의 그림이 붙여 썼다는 글 “진관자의 화권에 쓰다”에 의하면 허승은 “강세황, 최북 등과 오래 사귀었으며 그 화법이 정교하고 아름다움이 중국에 핍진하여 우리나라 화가들의 거칠고 소략함이 없으나, 격조와 힘이 조금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혼천의, 해시계 물시계, 옛 그리스, 문방기완, 의복, 무기 직물 도장 등 다방면에 능통하며 특히 도가의 수련법에 심오했다는 기록(1789년 기록)으로 볼 때 다빈치 스타일의 예술가였던 것 같습니다. 매주가 허승의 작업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지 더욱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정답은 주인과 노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