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이 유명한 사람인 만큼 그를 그린 초상화도 몇 폭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 손창근 기탁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고 있는 그림을 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 인물은 은은한 미소에 온화한 표정으로 그려졌습니다.
좌우로 긴 눈매 끝에는 세월이 남긴 주름이 자연스레 패여 있고, 듬성듬성 나 있는 눈썹이 이마를 반 이상 올라갔어도 부드러운 이미지를 해치지 않고 있습니다. 미간이 넓고 귀는 크고 귓불이 두툼합니다.
입은 다소 작고 입술이 얇아 웃음을 짓고 있지 않았다면 신경질적인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이 인물의 제자입니다.
이 초상화 속 인물은 누구일까요? 또 누가 그린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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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그림 속의 인상과는 달리 평탄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성미도 까다롭기 그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대의 천재로 평생을 공부하며 지낸 노학자에게는 이런 굴곡진 인생도 인품 속에 녹아난 듯 보입니다. 그를 존경해 마지않는 제자가 혼을 다해 그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정답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
문제의 그림에서 흐릿하게 지운 부분에 힌트가 있었습니다. 오른쪽 상단 부분에 추사의 또다른 호인 ‘완당阮堂’이 적혀 있습니다.
“완당선생초상阮堂先生肖像”이라는 전서 아래에는 행서체로 쓴 “소치허련사본小痴許鍊寫本”이 써 있어 그림을 그린 이는 소치 허련(1809-1892)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완당 선생 초상/ 소치 허련 사본/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78년 되는 갑자년(1924년) 여름에 오세창이 삼가 씀.
이 글씨를 쓴 이는 위창 오세창(1864-1953)입니다.
허련은 김정희의 제자로 그의 칭찬을 듬뿍 받았었고, 그 또한 극진히 스승을 모셔 제주도에 유배가 있을 때 세 번이나 (목숨을 걸고) 찾아간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왼쪽의 발문은 오세창과 같은 시대의 학자 윤희구(1867-1926)가 쓴 것입니다.
완당 어른의 초상화는 소치 허련이 그린 것인데...(중략)... 선생의 풍골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을 것이므로 초상화가 없어도 문제될 것은 없다. 초상화를 모시는 사람의 한결같은 존경심이 어찌 겉모습에 그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