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속 암자 안에 책이 가득 쌓여 있습니다.
이 그림은 중국의 한 고사인물의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어떤 사람이 젊어서 자기가 공부하던 한 산속 암자에 자신이 소장하던 책들을 남겨 후학들이 이 도서관 같은 곳에 와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의 성씨를 딴 이 산방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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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사는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남아 있는 소식(蘇軾, 1037~1101)의 글 「이군산방기李君山房記」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 친구 이상(李常, 이공택)은 젊었을 때 여산 오로봉 밑 백석암이라는 절에서 공부를 했었다. 이공은 이미 떠났으나 산 속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고 그가 거처하던 집을 가리켜 "이씨산방"이라 불렀는데 장서가 구천여 권이나 되었다. 이상은 이미 여러 학파들의 책을 공부하고 그들의 근원을 탐구하며 그들의 꽃과 열매를 채취하고 그 기름진 맛을 씹음으로써 자기 것으로 삼고 문장으로 표현해 내기도 하며 일을 하는데 드러내기도 하여 지금 세상에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책들은 여전히 전과 같아서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에게 남겨주어 끝없는 요구에 호응하게 하여 각기 재능과 분수로써 알아야 할 바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래서 책을 자기 집에 두지 않고 옛날 거처하던 절에 두었으니 이것은 어진 사람의 마음씨인 것이다....
그러니 정답은 “이씨산방李氏山房” 혹은 “이군산방李君山房”.
이광사 <이씨산방장서도李氏山房藏書圖>부분. 종이에 수묵담채, 23.1x29.0cm, 선문대학교박물관
소식은 이 글의 말미에서 자신은 노쇠하고 병까지 나 세상에 쓰일 곳이 없으니 여산의 ‘이씨산방’에 가서 책들을 읽으며 노년을 보내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그림은 바로 이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왼편 위에 이씨산방이 보이고, 화면 아래 오른쪽에는 늙은 학자가 젊은 선비의 안내를 받으며 다리를 건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노학자가 바로 소동파겠지요.
이 주제는 국립중앙박물관본, 선문대 필자미상본 등이 남아 있습니다.
원교 이광사는 조선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로 대대로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 출신이지만 당쟁 속에서 집안이 몰락했습니다. 본인 또한 1755년 나주 괘서사건에 연루되어 23년에 걸친 유배 생활 끝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원교체라는 독특한 서체를 완성하고 그림에도 솜씨를 보며 10여 점의 그림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장남이 실학자 이긍익입니다. 간송미술관에 전하는 대폭의 잉어 그림은 유배지를 따라다녔던 차남 이영익이 부친이 잉어 머리만 그려놓았던 것을 20년 뒤에 꺼내 완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