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묵란도는 크게 두 무더기의 난을 양쪽 위아래로 배치시킨 구도입니다.
윗부분의 난은 뿌리가 노출된 것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중국 남송 말의 정사초(鄭思肖 ? ~ 1332)의 고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그림도 나라를 빼앗긴 때 그려진 그림입니다.
뿌리가 드러난 묵란도, 즉 이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의 왼쪽 아래에는 화가 자신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고, 안중식, 오세창, 이도영, 최린의 후기찬문 등이 여백에 가득 차 있습니다. 난의 형태가 독특하여 끝이 뭉툭하고, 잎의 선이 고르며, 꽃 중심부에 딱딱 묵점이 찍혀 있습니다. 이것이 운미 민영익(芸楣 閔泳翊, 1860-1914) 묵란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윗부분의 난은 뿌리가 노출된 것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중국 남송 말의 정사초(鄭思肖 ? ~ 1332)의 고사에서 따온 것입니다. 나라를 잃으면 난을 그리되 뿌리가 묻혀 있어야 할 땅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이 그림도 나라를 빼앗긴 때 그려진 그림입니다.
뿌리가 드러난 묵란도, 즉 이 노근묵란도(露根墨蘭圖)의 왼쪽 아래에는 화가 자신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고, 안중식, 오세창, 이도영, 최린의 후기찬문 등이 여백에 가득 차 있습니다. 난의 형태가 독특하여 끝이 뭉툭하고, 잎의 선이 고르며, 꽃 중심부에 딱딱 묵점이 찍혀 있습니다. 이것이 운미 민영익(芸楣 閔泳翊, 1860-1914) 묵란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민영익, <노근묵란露根墨蘭> 128.5x58.4cm, 삼성리움미술관
민영익은 명성황후의 오빠인 민승호의 양자로 입양되어,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였습니다.
임오군란 진압 후 박영효, 김옥균 등과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고 톈진(天津)에 파견되기도 했습니다. 1883년 보빙사(報聘使)의 정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고 1884년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했습니다. 이조참의, 금위대장, 한성부 판윤과 병조 판서 등을 지냈습니다.
임오군란 진압 후 박영효, 김옥균 등과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에 다녀오기도 하고 톈진(天津)에 파견되기도 했습니다. 1883년 보빙사(報聘使)의 정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고 1884년 유럽을 경유하여 귀국했습니다. 이조참의, 금위대장, 한성부 판윤과 병조 판서 등을 지냈습니다.
고종의 폐위음모사건에 연루되어 홍콩, 상해 등지로 망명하였고 그 후 일시 귀국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로 친일 정권이 수립되자 다시 상해로 망명했습니다.
가학으로써 서화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서화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김정희의 제자인 허련(許鍊)을 자택에 머물게 하며 교류하기도 했습니다.
망명후 상해에 정착했을 때, 그가 오창석, 포화(蒲華), 서친주(徐親周), 고옹(高邕) 등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했습니다. 상해 서화가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청말 화풍을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독자적인 운미란(芸楣蘭)을 완성하였는데 이러한 화풍은 이하응(李昰應)의 석파란(石坡蘭)과 함께 조선미술전람회를 포함한 근대 한국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불어 김규진, 서병오 등 한국 서화가들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오창석, 포화 등 상해 화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양국의 회화 교류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
망명후 상해에 정착했을 때, 그가 오창석, 포화(蒲華), 서친주(徐親周), 고옹(高邕) 등 상해 서화가들과 교유했습니다. 상해 서화가들과 시서화로 교유하며 청말 화풍을 받아들이기도 하면서 독자적인 운미란(芸楣蘭)을 완성하였는데 이러한 화풍은 이하응(李昰應)의 석파란(石坡蘭)과 함께 조선미술전람회를 포함한 근대 한국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불어 김규진, 서병오 등 한국 서화가들이 상해를 방문했을 때 오창석, 포화 등 상해 화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양국의 회화 교류에 있어서 중추적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