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1676-1759) <일가정一架亭> 26.0x29.0cm 개인
* 《수류화개》 전 출품 (서울 백악미술관, 2022.06.18.~06.27)
그림 옆에 작게 추만공(楸巒公)이라고 써 있어서 그림 속 인물이 추만 홍영(楸巒 洪霙, 1584-1645)임을 알려주고 있다. 홍영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이다.
그는 1621년 급제해 형조참의, 첨지중추원사, 공조참의를 지내고, 1629년 왕의 특지로 예조참판에 올랐으나 사양했다. 한성부우윤 겸 도총부부총관, 동지중추원사를 역임했다. 1637년 병자호란으로 왕을 남한산성에 모신 공으로 가선대부, 도총부총관에 임명되었지만 병으로 중추부사를 지냈을 뿐이다.
홍양보다 그의 아버지가 더 유명한 인물로, 대사헌을 지낸 홍이상(洪履祥)이다. 부와 명예와 출세, 유복한 후손 등 사람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인정받아 조선 후기 많은 사람들이 그의 평생도를 그렸다.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중 일부(혼인식). 국립중앙박물관.
<일가정> 그림은 홍이상과 홍양의 후손이 겸재 정선(1676-1759)에게 부탁하여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존재했던 건물과 자연을 겸재의 방식으로 그려내었을 수도 있다.
병자호란의 혼란한 시기를 겪고 나이 들어 병든 몸으로 정자에 앉아 자연의 흥취를 즐기지만 이 또한 저물어가는 아쉬운 마음을 노래한 화제의 시적 자아는 홍양과 다르지 않음은 분명하다.
병자호란의 혼란한 시기를 겪고 나이 들어 병든 몸으로 정자에 앉아 자연의 흥취를 즐기지만 이 또한 저물어가는 아쉬운 마음을 노래한 화제의 시적 자아는 홍양과 다르지 않음은 분명하다.
一架亭
亂後逢今夕
茅齋仍小塘
園林當落日
衰病㥘傳觴
乍喜雲開月
還憐露湿香
吾儕俱暮境
卽此興偏長
楸巒公
전란 후에 맞이하는 이 같은 저녁
초가집 옆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하고
동산에는 해가 지는데
병든 몸은 술잔 하나 들기 힘들고
구름 속에 언뜻 비친 달에 기뻐하다가도
문득 향기에 젖은 이슬 안타깝구나
우리들 모두 저물어가니
이러한 흥취는 언제 보려나
글씨는 이광사(1705~1777)가 쓴 것이다. "匡師", "道甫(이광사의 자)" 두 개의 인장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