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문 <설중방우雪中訪友> 《고송유수첩》 종이에 수묵담채, 38.1×59.1㎝. 국립중앙박물관(덕수 4501)
나무와 지붕에 눈이 소복히 쌓인 한겨울 산 속의 작은 집, 창문 안으로 두 선비가 마주 앉은 모습이 보이고, 한 선비가 타고 온 교통수단인 듯 소를 붙잡고 밖에 서 있는 아이와 그 아이에게 주차 안내하듯 안쪽을 손짓하는 다른 아이가 있다. ‘설중방우’라 부르는 이 그림은 조선 후기 화가 고송유수관 이인문(1745~1824이후)이 겨울 산수와 함께 쌓인 눈을 헤치고 친구를 방문한 사람과 그 이야기를 그린 그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송유수첩』 안에 포함되어 있다.
화가 이인문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과 모였던 사실을 기록한 유명한 <누각아집도>와는 달리 ‘설중방우’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감상하게 되는 고사인물화이다. 예전에 있었던 잘 알려진 이야기, 고사故事를 그린 것이니 당시 사람들은 ‘응, 눈 왔을 때 친구 찾아갔던 그 얘기 장면이구먼.’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2002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시대 풍속화》 전시에 소개되면서 박물관이 펴낸 도록에는 이 <설중방우도>가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그의 신하 조보의 집을 방문하여 국사를 논하였다는 고사를 차용하여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송의 태조가 신하의 집을 방문하기 훨씬(몇 백 년) 전, 더 여운을 주는 ‘설중방우’ 레퍼런스가 전해져왔었다. 송나라 무제 때 편찬된 『세설신어』에 등장하는 1400여 개의 고사 중에 들어 있는 '설중방우'에서는 눈길을 뚫고 간절한 마음으로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만나지 않고 도로 돌아온다.
왕희지의 다섯째 아들이자 아버지 못지않은 유명 서예가였던 왕휘지(王徽之, 336~386)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어느날 자다 깨어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리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술상을 내어오게 해 술을 마시며 시를 읊으면서 달빛에 비치는 눈 풍경을 감상했다. 눈과 시와 술에 취해서였을지, 강 건너 사는 벗 대규(戴逵, 326~396)가 갑자기 그리워진 그는 사람을 불러 배를 섭외하고 밤새 눈오는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침나절이 다 되어 친구네 집 가까이 도달했을 때, 그는 이제 됐다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사공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를 묻자 왕휘지는 다음처럼 대답했다.
吾本乘興而來 내가 원래 흥이 일어나서 간 것이고
興盡而返 흥이 다하여 되돌아온 것이니
何必見戴 어찌 반드시 친구를 만나야 하겠는가
밤새 배 위에서 눈을 맞으면서 친구를 생각한 것으로 충분했다니 너무 자기중심적인 우정이 아닌가도 싶은데, 해 뜨고 눈 그친 아침에 친구를 만나 그 그리웠던 마음과 밤의 눈을 함께 감상하고 싶었던 마음을 공유하지 못하느니 그냥 돌아오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면 그 또한 이해가 된다.
이 설중방우가 조선 선비들의 취향에 더 맞았을 것 같은데, 반복해서 그려지다 보니 원래의 의미 보다는 ‘설중방우’ 키워드만 살아남은 것인지 아니면 조광윤이 신하를 만나러 간 이야기와 섞인 것인지 이인문의 그림에서 손님은 돌아가지 않고 당당히 친구의 집 안으로 들어가 만남을 성사시키고 있다.
이인문이 방했던 원본 조영석(1686-1761)의 <설중방우도>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방문객 선비의 옷차림이 조선식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중국의 고사를 그린 그림에 한복을 입은 선비들을 등장시키는 일이 종종 있지만, 이 시기에 귀를 엎은 방한용 차림의 갓 쓴 조선 선비를 설중방우 고사 속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은 조영석이니까 가능했던 것 아닐까. 조영석이 어떤 원본을 참고하여 설중방우를 그렸을지 모르겠지만 옷차림 등의 표현을 통해서 본인의 심상을 강하게 개입시킨 그림일 것이다.
조영석 <설중방우도> 종이에 담채, 115×57㎝, 개인
눈을 맞으며 지인을 찾아간 고사를 하나 더 찾아보자면 ‘정문입설(程門立雪)’이라는 것이 있다. ‘정씨 집 문 앞에 서서 눈을 맞는다’는 것으로 중국 송나라 때 양시와 유초가 돌아가신 스승 정호(程顥)의 집을 찾아가 그 동생 정이를 스승으로 맞고자 했는데 명상에 잠겨있던 정이를 기다리느라 눈이 한 자나 쌓이는데도 문 앞에서 기다렸다는 것이다.
정선 <정문입설> 종이에 담채 18.5×14.1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고사인물도는 금궤도처럼 우리나라 이야기를 그린 것도 있지만 서원아집, 미불배석, 삼고초려, 적벽, 왕희지환아, 파교심매, 어초문답, 귀거래사 등 당시 널리 알려졌던 중국의 인물과 그 이야기가 압도적으로 많다. 시대에 따라 인물 표현이나 구성이 조금씩 달랐겠지만 중국에서 건너 온 화보가 그림의 원본으로 절대적 위치에 있었던 것도 인정해야 한다. 중국의 소수민족 한복 운운하는 요즘, 더욱더 조선의 독자적 문화를 세우고자 하는 자긍심이 부족했던 선조들에 대해 아쉬움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