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세황(姜世晃, 1713-1791) <여지> 비단에 엷은 색, 26.1x18.3cm,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음식점의 후식에서 종종 만나곤 하는 열대과일 리치. 중국 남부가 원산지인 열대과일 리치는 우리 한자말로 여지(荔枝)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둘두둘한 붉은 색의 열매가 열리는데, 다소 단단한 껍질을 벗기면 독특한 식감을 가진 새콤 달콤한 흰 과육을 먹게 되는 것이다.
리치
우리 옛 그림 중에서 꽃이나 과일 식물의 모습을 그린 화훼그림은 형식적인 그림이 워낙 많고 화가의 개성을 드러내기 어려운데, 조선 후기 화단의 큰 어르신 표암 강세황이 남긴 여지 그림도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다.
중국에서 건너 온 화첩을 바탕으로 그렸을 테지만, 소재나 채색 구사에 있어서 뻔하지 않은 시도를 한 화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표암의 그림은 참신한 느낌을 준다. 표암이 남긴 다양한 화목 중에서 형이상학적인 문기보다는 산뜻한 담채의 이런 그림이 반전의 매력을 준다.
이 그림은 심사정, 조영석, 신위 등 여러 화가의 그림이 들어 있는 화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관 2514)에 포함되어 있다. 소박한 구성과 형태이지만 원숙한 필치를 드러내며 다홍색과 연두-초록의 대비가 상큼하다.
주문방인은 ‘강세황인’이고 화제는 다른 사람이 쓴 것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화가는 여러 종류의 그림을 잘 그려야 하는데 눈으로 볼 수 없는 용(龍)을 그릴 때도 그렇고, 이 여지 그림 또한 그렇다. - 연객(烟客)이 쓰다”
'연객'은 강세황의 친구 연객 허필이다. 그가 친구 강세황의 그림을 보고 나서 그 감상을 적은 것이다. (같은 화첩에 있는 강세황의 모든 그림에 연객이 쓴 제가 포함되어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용을 그릴 때나, 우리 주변에 없는 식물 여지를 그릴 때나 눈으로 보지도 않고서 다양한 그림을 잘 그린다는 칭찬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