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의 배경 화과산 수렴동
이 그림은 서유기 소설 내의 장면을 그린 것이다. 산수배경이 강조된 그림으로 동굴 안쪽의 암벽 사이에서 폭포가 세차게 내려오는 모습을 배경으로 복숭아를 따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와 다른 원숭이들이 그려져 있다. 위쪽에는 또다른 원숭이가 절벽 사이로 놓인 다리를 건너가며 의자와 탁자가 놓여진 공간을 내려다본다.
서유기의 주인공 수퍼 원숭이 손오공은 화과산 꼭대기 바윗돌에서 태어난다. 산중을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원숭이들과 즐겁게 살다가, 발원지를 찾아 개울을 따라 오르다 폭포 속으로 뛰어들었는데, 이곳에서 멋진 돌 저택과 꽃과 나무가 무성한 별천지 ‘화과산 수렴동’을 발견한다. 무리와 함께 여기에 정착, 원숭이들의 대왕으로 몇 백년이나 향락을 누리며 살았다. 이후 불로장생하는 법을 배우러 수행을 떠나기까지 살았고 그 이후 돌아오기도 하는 등 주요 배경이 되는 곳이다. 손오공은 후에 옥황상제의 명으로 복숭아 동산을 지키다가 불로장생 효과가 있다는 얘기에 귀한 복숭아들을 훔쳐먹기도 하고 서왕모 주최 파티에서 술도 닥치는 대로 먹는데, 이런 저런 장면을 ‘화과산 수렴동’이라는 배경 하에 그려넣었다.
흰 바탕에 먹으로만 그려진 이 그림의 상단에는 한글로 ‘화과산수렴동’ 이라고 쓰여 있고 왼쪽 책을 묶었던 판심 쪽에 한자로 花果山水簾洞이 써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중국소설회모본中國小說繪模本』 중 한 폭으로, 당시 중국에서 많이 전해졌던 백화소설의 삽화를 일부러 따로 그려 모아 만든 화첩이다. (이 화첩은 나중에 일본인이 표지를 바꾸어 겉장이 ‘지나역사회모본(支那歷史繪模本)’이라고 되어 있다.) 즉 대중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출판된 것이 아니라, 화가가 한 쪽 한 쪽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중국 소설 삽화를 그대로 모사하여 화첩으로 묶은 것은 이 회모본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한 면 전체 크기 28x19cm, 그림 크기는 24.4x16cm이며, 총 128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서유기 40폭, 수호지 29폭, 삼국지연의 9폭 등이며 화첩 앞쪽에 ‘완산 이씨’가 썼다는 ‘서序’와 ‘소서小敍’라고 붙여진 서문에서 제작동기, 묶은 이가 애독했던 83종의 책 이름을 리스트업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그림을 그린 이가 ‘김덕성 등의 화원’이라고 밝히고 있다.
사도세자의 소설 사랑과 화원 김덕성의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뇌공도 등으로 잘 알려진 화원 김덕성(1729(영조5)-1797(정조21)). 그는 영조의 사랑을 받았던 화원 김두량의 조카뻘 친척으로 1752년부터 1784년까지 궁중에서 화원, 자비대령화원 등으로 재직했다. 회모본 화첩의 서문을 작성한 ‘완산 이씨’라는 사람은 화원 화가를 동원해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 장면을 그리도록 했다는 점에서 궁중의 권위 있는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동안 영조의 사랑을 받던 옹주 중 한 사람이라는 추측도 있었지만 최근의 연구를 통해 사도세자(1735~1762)인 것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가 뒤주에 갇히기 나흘 전인 1762년 윤 5월 9일(음력)에 쓴 친필이기에 더욱 주목받게 된다.
사도세자는 영조나 생모 영빈이씨와 마찬가지로 소설을 아주 좋아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빈 이씨가 소장했던 소설 목록도 남아 있고, 영조의 경우는 병석에 있을 때 소설 낭독을 시켜 오디오북 역할을 하게 했다는 기록도 있고, 잠이 안 오면 한글 소설을 읽으라는 신하의 조언에 한글 소설보다는 한문책을 읽어야 잠이 올 것이라 농담한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남아있기도 하다. (반면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신하들도 소설을 읽으면 벌을 내릴 정도로 소설을 싫어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명말의 학자 진단유(1558-1639)가 “조선인들이 책을 대단히 좋아하여 중국에 入貢한 사신들이 자기나라에 없는 것이면 옛책이건 새로운 책이건 패관소설이건 가리지 않고 모두 구입하여 희귀한 책들이 도리어 중국보다 그 수가 많았다”고 할 정도로 조선 사람들이 소설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중국이 명대 인쇄 기술과 함께 판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대중에게 보급되도록 하는 토대가 되었던 반면 조선은 이렇다 할 출판문화와 판화 기술이 없었다. 세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조선 최고의 화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화원에게 중국에서는 판화로 제작되는 보급형 삽화 스타일로 붓으로 그리게끔 했던 것은 어떤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노련한 필력을 가졌을 화원에게 판화 삽화를 붓으로 베껴그리게 하면서, 새로운 스타일로 그려보도록 하거나 완성도 높은 판화 삽화를 가진 번안본을 만들 생각은 왜 하지 않았을까 아쉽기도 하다.
이 그림 또한 필력보다는 원본과 비슷한 느낌을 주도록 하는 모사에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고, 일정한 두께의 윤곽선으로 구성되는 밋밋한 그림에 테두리 구획까지 판화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 조선 말에 유행하는 수많은 삼국지 서유기 민화들도 중국에서 유입된 백화소설의 번안본을 차용해서 붓으로 그려냈을 가능성이 크다.
사도세자가 썼다는 회모본 서문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형형색색 울울창창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 중 귀감이 되고 경계가 될 만한 것과 웃음을 줄 수 있고 사랑스러운 것을 뽑아 책을 만들어 회사(繪士)인 주부 김덕성 등 약간 명으로 하여금 모사하게 하여 책을 만드니, 책을 펼치면 역대 사적을 분명히 알 것이다. 서를 써서 책머리에 싣고 발(跋)을 지어 말미에 덧붙여 후손에게 전하니 아무렇게나 보지 말 것이다.”
정신병증으로 괴로워하고 주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부왕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지옥같은 현실에서 소설로 도피하고자 했던 세자의 글이라 생각하면 그저 씁쓸할 뿐이다.
정신병증으로 괴로워하고 주변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부왕에 대한 두려움이 가득한 지옥같은 현실에서 소설로 도피하고자 했던 세자의 글이라 생각하면 그저 씁쓸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