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 <묵란> <묵죽> 1919, 종이에 먹, 각 130.1x64.4cm, 간송미술관
문인화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사군자 그림 중, 먹으로 그리는 대나무, 묵죽의 대가라고 한다면 조선시대에는 이정李霆, 유덕장柳德章, 신위申緯 등이 대표적으로 그 계보를 이어 왔다. 1920~1930년대의 묵죽 계보는 해강 김규진(金圭鎭 1868-1933)과 함께 김진우(金振宇 1883-1950)가 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독립운동가이자 서화가로 알려진 일주 김진우는 의병활동을 했던 유인석에게서 어릴 때 배우고 영향을 받았다. 1898년(16세) 결혼한 후 중국을 오가기도 하고 서화를 그리면서 종로통에서 서화상을 운영하기도 했다. 의정원(조선 임시정부 국회)에서 강원도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활동했는데, 1921년(39세) 상해에서 돌아오다가 체포되어 3년간 징역을 살았다. 이때 법원의 판결문에서 그간의 활동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피고가 서화계에 헌신한 것이 10여년에 이르렀으며, 동양 서화의 발원지인 중국으로 가서 이를 연구하고 또 명승을 탐방하려는 뜻을 가지고, 1919년 7월 중국 북경으로부터 휘호를 하며 천진 · 상해 · 홍콩 · 하문 · 광동 · 소주 · 남경 · 진강 · 무호 · 구강 · 한강 · 무창 · 한양 · 한천 등을 유력하였다.'
특별히 서화에서 누군가를 사사한 것 같지는 않지만 여러 기사에서 서화미술회에서 공부한 흔적을 보인다. 서화미술회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정이나 유덕장의 그림첩을 가지고 묵죽을 공부했으며, 형을 살고 나와서는 스스로 묵죽에 전념했다.
1925년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여러 신문에 새해 첫날 신춘휘호와 함께 그의 묵죽이 실렸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몇 차례 특선을 받기도 하고, 서화협회전람회에도 꾸준히 출품했다.
1929년1월1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신춘 묵죽
그는 "사군자는 다른 그림같이 '그린다'고 하지 않으며 '친다'라고도 하지만 본래는 '쓴다'고 해야 옳다"고 말한 적이 있다. 서와 화가 같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사군자 특히 묵죽은 자기 주장을 담은 글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이 두 폭의 그림은 쌍으로 제작된 묵란과 묵죽이다. 그림에 적힌 단기 4252년 기미년은 중요했던 그 해 1919년이다. 일주의 나이 37세 때로 그는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의원으로 활동하게 되니, 이 두 폭은 출국 전후의 그림이 된다.
김진우의 이 묵란도는 석파 이하응이 전형을 확립한 석란도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긴 화면 한쪽으로 바위를 배치하고, 그 위로 무성한 난잎이 자라 길쭉하게 뻗어나온 가닥들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묵죽은 기본적으로 『개자원화전』화보 형식을 참조하지만 과감하게 신죽과 노죽 등 다양한 모양새의 대나무를 시원하게 그려 자신감을 보인다. 자유자재로 먹의 농담과 거침없는 필치를 사용하고,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바람을 맞은 듯이 기울어져 있으면서도 버티는 듯 생생하고 강한 기질을 드러낸다. 출옥 후에 김진우는 묵죽에 전념하여 그로써 항일의지를 표현,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지도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때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김진우의 이 묵란도는 석파 이하응이 전형을 확립한 석란도 양식을 따르고 있다. 긴 화면 한쪽으로 바위를 배치하고, 그 위로 무성한 난잎이 자라 길쭉하게 뻗어나온 가닥들이 화면을 가로지른다. 묵죽은 기본적으로 『개자원화전』화보 형식을 참조하지만 과감하게 신죽과 노죽 등 다양한 모양새의 대나무를 시원하게 그려 자신감을 보인다. 자유자재로 먹의 농담과 거침없는 필치를 사용하고, 전체적으로 오른쪽으로 바람을 맞은 듯이 기울어져 있으면서도 버티는 듯 생생하고 강한 기질을 드러낸다. 출옥 후에 김진우는 묵죽에 전념하여 그로써 항일의지를 표현,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지도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는데, 이 때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묵란 그림에 있는 화제는 송나라 양만리의 ‘난원’이라는 시로 다음과 같은 뜻이다.
“굳세고 푸르르며 많고 많은 잎, 붉은 얼룩에 잔잔한 향기, 그윽한 향기 허공에 스스로 숨으려하나, 바람이 어찌 그 향기를 감출 수 있나.”
일주 김진우인 인장 외에 유인(遊印)으로 ‘시중화’ 즉 시 속 그림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묵죽 그림의 화제는 다음과 같다.
“옛 솥에 차 연기는 꺼지고, 가을 등불 아래 그림의 이치는 깊어지네. 차가운 창에 비바람 몰아치는 저녁에, 누워서 늙은 용의 울음을 듣네.”
“기미년 초여름 처음 열흘, 김진우가 그려서 위당선생 법안 아래 드린다”
찍혀진 유인은 동파 소식의 시에서 따온 ‘청풍오백간’이다.
그는 계속해서 서화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항일운동 이력으로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고 여러 번 구금되기도 했다. 해방 직후 인민당 감찰위원장으로 일하다가 1950년 12월 24일 서대문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계속해서 서화를 통해 활발한 활동을 했으나, 항일운동 이력으로 지속적으로 감시를 받았고 여러 번 구금되기도 했다. 해방 직후 인민당 감찰위원장으로 일하다가 1950년 12월 24일 서대문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