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청송당(聽松堂)
작자: 정선(鄭敾 1676-1759)
시기: 1755경
재질, 크기: 종이에 담채 29.5x33.0cm
출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동팔경첩》
코로나로 인해 산과 숲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는 소식이다. 코로나 재난이 아니더라도 7월은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빼놓으면 솔바람 솔솔 부는 솔밭이 절로 생각나는 시절이다.
조선 화가 가운데 솔밭을 가장 잘 그럴듯하게 그리고 가장 멋들어지게 그린 화가는 단연 18세기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다.
동양에서 소나무는 꼿꼿하고 푸르다는 상징성 때문에 아주 각별하게 여겨졌다. 이런 사실과 얼마나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그림으로도 아주 일찍부터 그려져 인기가 높았다. 당나라 때 이미 소나무 그림으로 이름을 떨친 고수들이 여럿 있었다.
조선에서도 겸재 이전에 소나무를 그린 화가들은 여럿 있었다. 조금 앞서긴 해도 엇비슷한 시대를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1668-1715)도 소나무를 자주 그렸다. 나무 아래 앉은 고사(高士)들이 멀리 흘러가는 물을 보고 있거나 바둑을 두는 장면을 그리면서 대개 큰 소나무 한 그루를 그린 게 많이 있다. 그렇지만 정선처럼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솔밭은 한 번도 그리지 않았다.
정선도 물론 소나무도 그렸으나 장년 이후가 되면 그림마다라고 할 정도로 무수한 솔밭이 등장한다. <청송당> 역시 그중 하나다. 이 그림은 그가 나고 살았던 옥인동, 청운동 일대를 그린 《장동팔경첩》에 들어 있는 것이다.
청송당의 위치는 지금으로 보면 경기상고 있는 부근으로 조선 전기에 이곳에 문인 성수침(聽松 成守琛)의 서재가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당시 푸른 소나무가 큰 숲을 이루고 있어 당호를 청송당이라고 하고 자신도 청송이란 호를 썼다고 한다.
겸재 때에도 이 소나무 숲이 남아있어 진경산수의 대가인 그가 그렸다고 볼 수 있는데 당 뒤편의 솔밭에는 지금이라도 시원한 솔바람이 불어올 듯이 리얼하다. 겸재 솔밭에는 그만의 특징이 있다. 먹으로 가로 선을 적당히 여럿 그어 놓고 그 위에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먹 점을 쿵쿵 반복해 찍어서 뚝딱 솔밭을 그려내는 것이다.
<문암관일출(門岩觀日出)>(《신묘년 풍악도첩》 중), 1711년, 비단에 담채, 37.9x36.0cm, 국립중앙박물관
그렇지만 처음부터 이런 솔밭을 그린 것은 아니다. 이른 시대에 속하는 《신묘년 풍악도첩》(1711년) 그림을 보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꼼꼼하게 그렸다. 그가 독학할 때 옆에 두고 익혔던 『개자원화전』에는 이런 묘사 사례가 있다.(북송의 곽희(郭熙)와 원말 왕몽의 소나무 그리는 법이 대표적이다.)
어쨌든 이런 시기를 거친 뒤 그는 자신만의 솔밭 묘사 시대로 들어가는데 그 후 많은 겸재파 화가 중에서 이를 제대로 터득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로 솔바람이 느껴지는 겸재의 솔밭이 새삼 생각나는 것은 코로나 외에도 며칠 전 국제자연보호연합이 송이버섯을 절멸위기종으로 지정했기 때문이다. 송이를 너무 캔 까닭이 아니라 건전한 송림, 즉 솔밭이 점점 줄고 있다는 것이 이 단체가 밝힌 지정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