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종려도(棕櫚圖)
작자: 정수영(鄭壽永 1743-1831)
시기: 19세기 전반
재질과 크기: 수묵담채 30.5x35.5cm
출전: 『자연 그리고 삶, 조선 시대의 회화』(홍익대학교박물관 도록)
올여름 무더위는 각오하라는 예고가 있다. 지난겨울이 그렇게 따뜻했던 만큼 여름 더위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얘기다. 더위 하면 산과 강이 먼저 떠오르나 이번 여름은 고민스럽게 됐다. 코로나 19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생각하면 적이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바이러스 재앙이 없던 조선 시대의 피서는 어땠는가. 옛 그림에는 웃통을 벗어부치고 소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바람을 쐬는 이른바 거풍(擧風) 장면을 그린 게 종종 있다. 또 납량(納陽) 공포영화를 보듯이 꽁꽁 얼어붙은 강변이나 눈 내리는 산속 풍경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오돌오돌 떠는 기분을 맛보기도 했다.
이 야자나무 그림도 납양용이었을까? 이는 단원 김홍도보다 2살이 많았던 문인화가 정수영(鄭壽永)이 그린 <종려도>이다. 종려나무는 야자나무의 다른 말이다. 얼마 전만 해도 여름이 되면 울긋불긋한 하와이언 셔츠 차림에 야자수 아래 길게 누워 주스 잔 따위을 들고 있는 광고 사진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야자나무가 남국의 상징처럼 여겨졌는지는 알 수 없다. 파초에는 다분히 그런 기분이 있었다. 당나라 왕유가 마음 내키는 대로 설중파초(雪中芭蕉)를 그렸다는 일화는 문인 화가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에서만 났을 종려나무를 정수영이 직접 보았던가. 그는 조선팔도를 여행하면서 지도를 제작한 정상기의 증손자이다. 본인도 금강산을 올랐다. 또 남한강과 임진강을 배로 유람한 뒤에 16m나 되는 거대한 실경 그림을 남겼다. 그렇지만 제주도 여행 기록은 없다.
이 그림은 당시의 베스트셀러 화보였던 『개자원화전』에 나오는 종려나무에서 힌트를 얻어 그린 것이다. 화보에는 덜렁 야자나무 3그루만 나온다. 거기에 그는 근사한 바위와 운치 있는 잡풀을 더해 한 폭의 감상화로 완성했다. 옆에 쓴 화제는 ‘이 그림인 즉 당나라 사람들이 정원이나 산림 그림에 많이 그렸다. 그 후에 곽충서도 매번 이를 그렸다(此則唐人多畵於園林山中, 其後郭忠恕每爲之)’이다.(*)
개자원화전의 종려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