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난히 봄의 꼬리가 긴 것 같습니다. 이제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이렇듯 아침저녁 찬 바람 선뜻했던 날씨를 그리워하게 되겠지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숨어 있는 두 폭의 그림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린 사람이 정확치 않은데, 박물관 자료에는 이민성(李民宬)의 그림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둘 다 깊은 산 속을 그린 것인데 들여다보면 한 폭에는 선비 한 사람이 계곡에 앉아 산에서 내려오는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모습이 들어 있고, 다른 한 폭에는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한 남자가 사립문에 긴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모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많은 시의도가 제작되는데, 그중에서 속세를 피해 산에서 유유자적하는 은자의 모습을 이상화한 것들이 인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18세기에 이르면 정쟁이 치열해지면서 경화세족의 선비들은 ‘벼슬길에 올라봤자...’라는 생각이 당연히 들 테고 이러한 은자의 삶이 더욱더 이상적인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이인문(李寅文, 1745-1824이후) <산정일장도> 견에 담채 110x41.8cm 국립중앙박물관 덕수 6024
이 그림들을 그저 산수도라고 이름붙일 수도 있겠지만 이 두 장면, 즉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발을 씻음’과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에 서있음’은 유명한 시에 포함되어 있는 도상으로, 보통 “산정일장山靜日長”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산정일장’의 원천은 북송의 시인 당경(11-12세기)의 시이지만, 이를 인용하면서 풀어 써서 그림의 주제가 된 것은 나대경(13세기 남송)의 글입니다.
나대경은 자신의 문집 『학림옥로』중 ‘산정일장’ 편에서 당경의 시 「취면」의 맨 앞쪽 구절 “산은 태고인 양 고요하고 해는 소년시절처럼 길기도 하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을 인용하면서 글을 이어나갑니다.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산정일장도는 대개 8폭에 나눠 그렸는데, 그 구분에 따라 번호를 붙였습니다.
1)
산은 태고처럼 고요하고 해는 소년시절처럼 길기도 하다(山靜似太古 日長如小年)
내 집은 깊은 산 속에 있어 매년 봄이 가고 여름이 올 때면(余家深山之中 每春夏之交)
푸른 이끼 섬돌에 차오르고 떨어진 꽃이 길바닥에 가득하네(蒼蘚盈堦 落花滿徑)
문에는 두드리는 사람 없고 솔 그림자 들쑥날쑥한데(門無剝啄 松影參差)
새 소리 위 아래로 오르내릴 제 낮잠이 막 깊이 드네(禽聲上下 午睡初足)
돌아가 산골 샘물 긷고 솔가지 주어와 쓴 차를 끓여 마시네(旋汲山泉 拾松枝 煮苦茗啜之)
2)
마음 가는대로『주역周易』『국풍國風』『좌씨전左氏傳』『이소離騷』『사기史記』, 그리고 도연명과 두보의 시, 한유와 소동파의 문장 몇 편을 읽는다(隨意讀周易 國風 左氏傳 離騷 太史公書 及陶杜詩 韓蘇文數篇)
3)
한가로이 산길을 거닐며 소나무 대나무를 쓰다듬고(從容步山徑 撫松竹)
사슴, 송아지와 더불어 긴 숲, 우거진 풀 사이에 함께 누워 쉬기도 하고(與麛犢 共偃息於長林豊草間)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찰랑이며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는다(坐弄流泉 漱齒濯足)
4)
대나무 그늘진 창 아래로 돌아오면 산사람 같은 아내와 자식들이(旣歸竹窗下 則山妻稚子)
죽순과 고사리 반찬에 보리밥 지어내니 기쁜 마음으로 배불리 먹는다(作筍蕨 供麥飯 欣然一飽)
5)
창가에 앉아 글씨를 쓰되 크기에 따라 수십 자를 써보기도 하고(弄筆窗間 隨大小作數十字)
간직한 법첩·필적·화권畵卷을 펴놓고 마음껏 보다가(展所藏法帖 墨跡 畵卷 縱觀之)
흥이 나면 짤막한 시도 읊조리고 옥로시 한 두 단락 초 잡기도 한다(興到則吟小詩 或艸玉露一兩段)
6)
다시 쓴 차 달여 한 잔 마시고 집밖으로 나가 시냇가를 걷다보면(再烹苦茗一杯 出步溪邊)
밭둑의 노인이나 냇가의 벗들과 만나 뽕나무와 삼베 농사를 묻고 벼농사를 말하고(邂逅園翁溪友 問桑麻說秔稻)
날이 개거나 비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 주고받다가(量晴校雨 探節數時 相與劇談半餉)
7)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 서니 석양은 서산에 걸려 있고(歸而倚杖柴門之下 則夕陽在山)
자줏빛·푸른빛이 만 가지 형상으로 문득 변하여 사람의 눈을 황홀하게 한다(紫翠萬狀 變幻頃刻 恍可人目)
8)
소 잔등에서 피리 부는 목동이 짝지어 돌아올 때면(牛背篴聲 兩兩來歸)
달빛은 앞 시내에 뚜렷이 떠오르네(而月印前溪矣)
그러니 두 폭의 그림은 8개의 장면 중에서 3번 흐르는 시냇가에 앉아 찰랑이며 양치질도 하고 발도 씻는다(坐弄流泉 漱齒濯足)와 7번 돌아와 지팡이에 기대어 사립문 아래 서니 석양은 서산에 걸려 있고(歸而倚杖柴門之下 則夕陽在山)의 장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화제가 써 있다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나란히 보관되어 있는 이 족자 그림 두 점은 조선 후기에 산정일장 그림이 유행할 때 김홍도 풍으로 그려진 그림일 가능성이 크고, 어디엔가 다른 여섯 장면이 남아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