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백자청화철채산수문가형연적(白磁靑畵鐵彩山水文家形硯滴)
화가 : 작자미상
크기 : 높이 4.8cm
시기 : 19세기
소장 : 간송미술관
전시 : 동대문디자인박물관의 대한콜렉숀전(2018.12.4-2019.3.3)
집이 시끄럽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집값이 오른다고 아우성이더니만 이제 거래가 끊겨 공인중개사들이 굶어죽게 생겼다고 한숨이다. 더해서 공시지가 재조정으로 재산세를 걱정하면서 ‘집하나 있는 게 죄냐’는 항변도 속출한다.
집은 사람 사는 기본이다. 이 문제는 비단 오늘날만의 사정은 아니다. 조선후기에도 심각했다. 김홍도(1745-1806이후)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박제가(1750-1805)는 어려서 여러 번 이사를 했다. 11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청교(을지로5가) 집을 나와 묵동, 필동 등을 전전했다. 이사통에 어린 시절 베껴놓은 글 조각들이 모두 없어져버렸다고 탄식한 내용이 그의 글에 보인다.
박제가의 고생은 조선후기 한양의 인구 급증에서 비롯됐다. 안 그래도 부족한 집 문제 위에 부유한 양반, 상인들이 무분별하게 민가를 사들여 집을 늘리면서 민원이 폭발했다. 그래서 영조(재위 1724-1776)까지 직접 나서서 여염집 탈취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집에 대한 한이 있어서인가 19세기가 되면 조선 도자기에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는 집 형태 연적이 등장한다. 이 도자기 연적은 기역자로 꺾인 집을 백자로 빚고 청화로 지붕을 올리고 철화로 기둥을 삼았다. 벽에는 운치 있게 매화, 대나무도 그려 넣었다. 기둥 수를 보면 방 세 칸에 대청에 부엌 하나의 집으로 짐작된다. 이 정도면 부모님 모시고 아들딸 데리고 3대가 함께 살기 딱 좋다. 가히 조선시대 국민주택형 집이라 부를만 하다.
집 문제가 해결 됐으면 남자 일의 절반은 해낸 셈이다. 나머지는 열심히 학문에 정진해 학문과 지식으로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 연적의 주인도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연적이 놓인 상 위에서 책장을 넘겼을 것이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