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용, 말, 소, 심지어 원숭이나 쥐도 우리 옛 그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12지 동물 중 가장 그 예를 보기 드문 것이 돼지이다. 돼지가 우리에게 재물 복, 먹을 복을 상기시켜 준다는 사실에 비춰봤을 때는 조금 의아한 일이다.
돼지꿈에 복권 사기, 정월 상해일(上亥日)에 가게 문 열기, 저금통을 돼지 모양으로 만들기(돼지저금통은 서양에서 왔다고 하지만) 등은 모두 돼지에 관한 길(吉)하고 복스러운 이미지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해지는 몇몇 전래동화나 속담 등에서 돼지는 탐욕스럽고 더럽거나 게으른 동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19세기 말에 그려진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첩 중 객주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객주집 안쪽 부엌에서 여인이 손님을 위한 음식을 장만하고 있고, 부엌 안쪽에 검은 동물 한 마리가 새끼 두 마리를 데리고 헛간을 빠져나오고 있다. 이 동물은 돼지로 보인다.
김준근 〈넉넉한 객주〉, 《기산풍속도첩》, 19세기 말, 무명에 채색, 28.5×35.0㎝,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우리나라 고유 품종인 재래돼지(Korean Native Pig)는 2,000년 전 만주 지역에서 서식하던 소형종 돼지가 한반도로 유입되어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고유한 형태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조선시대 문헌에 의하면 재래돼지는 “피모가 흑색으로 체격은 왜소하고 체중은 22.5~32.5kg이며 머리는 길고 뾰족하며, 배는 심히 하수되어 있고, 만숙에다 비만성이 없으나 체질은 강건하고, 번식력도 양호하며, 특히 육미는 조선 사람들의 입맛에 적합한 것 같다”고 되어 있다. 검고 날렵한 그림에서의 모습과 유사하다.
김준근 <산제> 19-20세기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소와 함께 돼지는 하늘에 바치는 제수祭需로 많이 희생됐다. 고구려로 올라가면 돼지를 제사용으로 사용하는 데에 사람들이 온갖 금기나 원칙을 만들어 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마을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 흰털이 박히지 않은 ‘꺼먹(검정)수퇘지’를 고집하는데, 흰털이 조금이라도 박히면 사용하지 않았다. 원래 조선 돼지의 색깔은 검기도 하지만 부정타지 않게, 순수한 의미를 보다 강조했기 때문일 것이다.
평소 육류를 잘 섭취하지 못했을 시절임을 감안하면 제수로 올린 돼지가 동제를 최고의 음식잔치로 만들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동제를 기다린 실질적인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 묘의 외부에는 십이지신상 호석이 있고 이 중 하나인 돼지신의 형상을 보면, 반월도를 든 무사로 묘사되어 있다. 묘 부근의 땅 속에서 출토된 곱돌로 만든 돼지상도 있다.
십이지신상 탁본, 광복 이후.
김유신金庾信, 595~673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십이지신상 호 석護石 가운데 하나인 돼지신의 형상을 탁본한 그림이다.
김유신 장군묘의 십이지신 중 돼지. 왼쪽이 호석, 오른쪽은 곱돌제.
이 상은 김유신 장군묘라고 전해지는 무덤을 보수하던 중, 봉분의 주변에서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한 것으로, 높이는 40.8cm, 너비가 23cm, 두께는 8cm의 부조상이다.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잡귀를 막는 용도로 십이지신을 그린 그림을 걸었는데, 열 두 방위 가운데 북북서 방향을 지키는 해신亥神의 이미지는 종종 가난하여 의복이 없는 이에게 옷을 전하는 착한 신으로도 알려졌다.
십이지신도(돼지) 대한제국 통도사 성보박물관.
십이지신도(해신 비 갈라대장) 1977년.
약사여래신앙과 관련하여 사찰내의 약사전藥師殿 십이지신 탱 화 등에 등장하는 돼지 해신亥神 은 비갈라대장毘乫羅大將이다.
종류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멧돼지 그림은 수렵도 또는 호렵도에서 맹수 사냥감의 모습으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수렵도 12폭 병풍 중 부분, 19세기, 106.5x582cm(전체). 삼성미술관 리움
이 그림은 광활한 산야를 가로질러 달리며 호쾌한 사냥놀이를 펼치는 광경이다. 위로 올라가면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벽화, 고려 공민왕이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천산대렵도 등이 있었지만 이러한 민화 수렵도는 그 전통과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지 불분명하다. 매사냥을 하는 인물, 창이나 활로 호랑이와 멧돼지를 쫓는 인물 등이 모두 중국식 복장을 하고 있다.
민화 수렵도 8폭 병풍 중 부분, 19세기, 78.5x351cm(전체). 개인 소장
백수도百獸圖 10폭 병풍, 18세기, 110x330cm 개인소장
백수도 중 부분
운보 김기창 또한 멧돼지를 쫓는 수렵도를 몇 점 그렸다. 운보의 힘찬 필치로 나는 듯 달려가는 말, 광활한 들판과 산이 그려져 과거 수렵도에서 표현하고자 한 용맹함, 기상 등을 느낄 수 있다.
만약 이 그림들 중 한 점의 그림을 바탕화면으로 선택한다면?
반월도를 든 김유신 장군묘의 호석을 택하겠다. 배불리 먹고 게으른 돼지가 아닌, 현명하고 강하고 약한 자들을 지켜주는 모습의 해신이 2019년 한해를 함께 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