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1843-1897) <파초도> 종이에 수묵담채 126.4x32.5cm 홍익대학교박물관
바나나처럼 생긴 파초.
중국 남부 따뜻한 지방에 살던 식물로 이색적인 분위기를 내기에 그만이었던 탓일까요.
중국 유명 문인들의 글에 단골로 실려 왔던 파초는 고려 후기부터 이 땅에 살던 문인들이 사랑하여 정원에 고이 심고 길러 왔습니다.
조선 후기에 화훼에 대한 취미가 유행하고 문인화나 화보의 영향이 더해져서 산수화나 고사인물화 배경에 파초가 그려지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장승업의 파초도에는 이런 배경을 깔고 그 위에 청대 양주화파나 해상화파의 감각을 더하여 이색적인 색감과 구도를 맘껏 펼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이에 혹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장승업의 많은 파초 그림 가운데 이 그림은 아주 독특한 면이 많습니다. 대담한 구도에 담채로 맑은 청록의 파초 잎, 맑은 갈색의 바위, 국화의 노랑 곁에는 포인트로 짙은 붉은색과 푸른색의 잎을 배치했습니다.
파초 줄기는 중앙을 가로지르며 전면에 배치하면서도 아주 옅은 담묵을 써서 오히려 그 모양새가 강조되었는데,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자면 초점이 뒤의 국화와 바위에 있어 전면의 파초 잎이 흐리게 핀이 나간 느낌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왼쪽의 화제를 살펴보겠습니다.
輕烟細雨重陽節,曲檻疏籬五柳家 경연세우중양절 곡함소리오류가
안개처럼 가랑비 내리는 중양절,
구부러진 난간 성긴 울타리는 오류선생의 집(五柳家) 같구나
송나라 유자휘(劉子翬, 1101-1147)의 시「국菊」*에 나오는 구절로, 파초가 아닌 국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양절은 가을이 한창인 음력 9월 9일을 말하며, 오류가는 도연명이 집 앞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자신을 오류五柳선생이라고 불렀던 데서 세상을 멀리하고 가난하게 사는 선비의 집을 의미하게 됐습니다.
오원이 화제에 어떤 무게를 두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그림에서 주인공은 파초가 아닌 국화였으려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이 글이 업로드 될 예정인 2018년 10월 17일)은 마침 가을의 한가운데인 음력 9월9일 중양절입니다. 봄부터 소쩍새 울어 이제 피어난 국화 옆에서 올해가 저무는 헛헛한 심사를 달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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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菊(宋·劉子翬 七言律詩)
青叢馥鬰早抽芽,金蕊斕斑晚著花。
秋意祇應宜淡泊,化工可是惜鉛華。
輕烟細雨重陽節,曲檻疏籬五柳家。
暮醉朝吟供採摘,更憐寒蝶共生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