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구靑駒 이마동李馬銅(1906-1981) <남자>(1931) 유화 115x87cm, 국립현대미술관
헤어스타일이며 의상이 지금 사람들 못지않게 세련되었습니다. 지적 분위기를 뿜어내는 훈남의 젊은 청년이 화면을 가득 채워 무대 위 같은 극적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남자의 시선이 가 있는 공간, 엄격한 색채와 자세, 과감한 구도와 대비 효과 등으로 정적인 속에 역동성을 담은 그림이 되었습니다. (<사나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순우리말과 한자말의 차이일 뿐이지만 ‘사나이’보다는 ‘남자’라는 제목이 덜 마초적이고 세심해 보이는 개인적 느낌으로 ‘남자’가 제목으로 어울려보입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마동은 휘문학교에서 고희동 이한복에게 지도받은 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온 이종우의 아틀리에에 다니기도 하고 도쿄미술학교 출신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가 경성에 세운 조선미술원에서도 수학했습니다. 1927-1932년 일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 가서 공부했습니다. 특별전형이거나 다른 과가 아니라 서양화 본과에 입학한 한국인은 그가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도쿄미술학교의 분위기 등을 생각해 볼 때 1931년에 그려진 이 그림의 제재나 형식에서 19세기 유럽 회화(특히 사실주의)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이경성 선생님은 이 시기 이마동의 그림은 도쿄미술학교 재학시절에 지도교수였던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영향이 컸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시 도쿄미술학교의 분위기 등을 생각해 볼 때 1931년에 그려진 이 그림의 제재나 형식에서 19세기 유럽 회화(특히 사실주의) 느낌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이경성 선생님은 이 시기 이마동의 그림은 도쿄미술학교 재학시절에 지도교수였던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영향이 컸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마동은 졸업하고 귀국한 직후 1932년 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이 그림을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고, 13회에도 출품하였지만 이후 선전에 반대하는 목일회에 가담하면서 선전 대신 서화협회전람회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 그림은 당시 이왕가에서 구입하여 창덕궁 창고에서 거의 40년간 잠자고 있었습니다. 이후 세상에 공개된 것은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 근대미술 60년> 전시에서였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을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려진 모델은 누구일까요. 함께 수학했던 젊은 화가들 중 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본인의 모습이 투영된 실재하지 않는 인물일까요.
근대의 고민을 짊어진 젊은이의 모습에서 약간의 지적 허영이 느껴진다면 제가 비뚤어진 탓일까요?
근대의 고민을 짊어진 젊은이의 모습에서 약간의 지적 허영이 느껴진다면 제가 비뚤어진 탓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