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의 꿈을 꾸고 안견으로 하여금 몽유도원도를 그리도록 한,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글씨입니다.
안평대군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 글씨, 그림을 모두 잘했는데 특히 글씨에 능하였습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형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죽어서는 글씨마저 태워지고 영조가 복권시킬 때까지도 대역죄인으로 남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작품 뿐 아니라 그가 모았던 귀한 소장품은 모두 유실되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의 글씨로 만든 경오자 활자는 세조(수양대군)가 녹여 을해자로 만들어버렸으며, 돌에 새긴 글씨 외에 남아 있는 그의 필적은 <몽유도원도>의 제발과 이 <소원화개첩> 뿐입니다.
그의 글씨로 만든 경오자 활자는 세조(수양대군)가 녹여 을해자로 만들어버렸으며, 돌에 새긴 글씨 외에 남아 있는 그의 필적은 <몽유도원도>의 제발과 이 <소원화개첩> 뿐입니다.
『소원화개첩』은 가로 16.5㎝, 세로 26.5㎝로 비단 위에 행서체로 쓰여진 것으로 모두 56자가 들어 있습니다.
원래의 시는 당나라 시인인 이상은이 지은 것인데 원문과 다른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비록 소품이기는 하지만 그의 행서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조맹부체의 영향을 받았으나 조맹부 보다도 더 웅장하고 활달한 기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원래의 시는 당나라 시인인 이상은이 지은 것인데 원문과 다른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비록 소품이기는 하지만 그의 행서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조맹부체의 영향을 받았으나 조맹부 보다도 더 웅장하고 활달한 기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소원화개첩〉은 2001년에 도난되어, 국보 238호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그 소재가 현재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