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야마 번의 번사(藩士)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오카야마 출신의 화가 마쓰바라 산고로(松原三五郎)의 화숙에서 처음 유화를 배웠다. 16살때 상경했으나 각기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귀향 이후에는 독학으로 초상화를 익혀 오카야마와 시고쿠 일대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제작했다. 1892년 재차 상경해 고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郎)의 부동사(不同舍)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유화를 수학하는 한편 생활을 위해 교원자격증을 얻었다. 이후 시가현, 미에현 등지의 중학교 교원으로 재직했으며 작품은 메이지 미술회에 출품하면서 작가 생활을 계속했다. 그리고 영어를 익혀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는 같이 간 미치타니 구니시로(満谷国四郎), 마루야마 반카(丸山晩霞) 등과 함께 보스톤에서 수채화전을 열어 큰 성공을 거뒀다. 이때 모은 자금으로 이듬해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장-폴 로랑스의 아카데미 줄리앙에 입학해 고전주의 회화를 체계적으로 배웠다. 1904년 귀국해 교토에 화숙을 열어 활동하며 태평양미술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교토에서는 파리에서 알게 된 아사이 추(淺井忠)의 쇼고인(聖護院) 양화연구소에서 화가 지망생들을 함께 지도하기도 했다. 또한 그를 도와 간사이미술원 창립에 힘을 보탰다. 이런 활동과 함께 당시 일었던 수채화 붐에 저항해 수채화가 미야케 곳키(三宅克己)를 상대로 '유화가 본류이며 수채화는 보조에 불과하다’는 수채화 논쟁을 벌였다. 1906년부터 2년간 두 번째 파리 여행때에는 살롱 드 파리전에 <소녀>를 출품해 입선했다. 프랑스행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1916년에도 계속돼 이때는 스미토모 집안의 15대 당주인 스미토모 도코이토(住友友純)의 후원을 받았으며 또 파리 일본대사관 관내의 넓은 방을 제공받어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제자로 쓰다 세후(津田青楓), 사이토 요리(斎藤与里), 야스이 소타로(安井曾太郎), 나카무라 겐이치(中村研一), 기타와키 노보루(北脇昇) 등이 있다. 1932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