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사가 번의 번사. 19살 때 오카다 집안의 양자가 됐다. 소년 시절 사가번주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 저택에 기거하며 햐쿠타케 가네유키(百武兼行)의 그림을 보며 양화가의 꿈을 키웠다. 동향의 구메 게이치로(久米桂一郎)를 통해 구로다 세이키(黒田清輝)을 알게 돼 천진(天眞)도장을 다니며 두 사람의 지도를 받았다. 1896년 도쿄미술학교에 서양화과가 신설되었을 때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와 함께 조교수로 발탁됐다. 이해 결성된 백마회에도 함께 참가해 활동했다. 1897년 문부성 제1회 유학생으로 선발돼 4년간 프랑스에 유학하면서 라파엘 코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코랑의 특기인 섬세하며 우미한 묘사는 이후 오카다 화풍의 특징이 됐다. 귀국 후에 문전(文展)의 심사위원을 맡는 등 주로 관전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작품은 풍경보다 여인상을 주로 그렸다. 1907년의 도쿄권업박람회에 출품한 <부인상>은 1등상을 수상했으며 당시 미쓰코시 백화점의 광고로 사용되기도 했다. 장식적이면서 관능성을 감춘 감미로운 이미지의 부인상은 나중에 메이지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의 하나가 됐다. 1919년 제국미술원 회원, 1924년 동경미술대학 서양화과 주임, 1934년 제실기예원, 1937년 문화훈장 수상, 제국예술원 회원 등을 차례로 거치며 관학파의 중심화가가 됐다. 부인 오카다 야치요(岡田八千代)는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