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미토 번의 번사(藩士). 21살 때 모계인 요코야마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1889년 동경미술학교 제1기생으로 입학해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하시모토 가호(橋本雅邦)에게 수학했다. 동기생 가운데 시모무라 간잔(下村観山), 사이고 고게쓰(西郷孤月)가 있으며 1년 후배로 히시다 슌쇼(菱田春草)가 들어왔다. 입학이후 덴신의 훈도를 받으며 서양화와의 대결 위에 세계성을 갖추자는 덴신의 신일본화 창조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졸업후 교토시립미술공예학교의 예비교사로 재직하며 처음으로 다이칸이란 호를 썼다. 1896년 동경미술학교 조교수로 자리를 옮겼으나 2년 뒤 교장 덴신이 투서 사건으로 학교를 사직할 때 함께 학교를 나와 일본미술원 창설에 참가했다.
1903년 덴신과 동행해 인도를 여행하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을 여행했다. 여행 중에 동행한 시모무라와 함께 캘커타, 뉴욕, 보스톤, 런던 등지에서 전시회를 열어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 화제가 된 것이 몽롱체(朦朧體)로 불리는 이색의 화풍이다. 몽롱체는 선 중심의 전통회화 기법을 버리고 공기와 빛의 효과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몰골 화법에서 창안된 새로운 화풍이다.
1907년 문부성미술전람회(文展)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서양화에 뒤떨어지지 않는 색채 감각을 보이는 린파(琳派)를 소개하면서 다이쇼(大正) 시대의 린파붐을 이끌었다. 1934년에 제1회 아사히(朝日)문화상, 1935년 제국미술원 회원, 1937년 제1회 문화훈장 등을 수상하며 신일본화의 소개와 확산을 이끌었다. 대표작으로 후지산 연작과 <굴원> <지치부영봉 춘효(秩父霊峰春暁)>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