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유학해 아카데미즘의 세례를 받은 마지막 화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여러 지방을 전전하며 사환, 직공 등의 허드렛일로 생활했다. 19살 때 독학으로 교원시험에 합격해 소학교 교사가 됐다.(이때 가르친 제자에 히시다 슌쇼(菱田春草)가 있다) 이 무렵 유화의 기초를 익히면서 화숙 부동사(不同舍)에 들어가 고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郞)와 아사이 주(淺井忠)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메이지미술회에서 활동하며 아사이 주의 주선으로 문인이자 가인(歌人)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가 주간으로 일하던 신문에 삽화를 그렸다. 또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등과 같은 유명 문인들의 작품 표지장정과 삽화를 제작했다. 1895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종군화가로 참가해 조선과 중국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혔고 특히 서예 예술에 눈을 뜨게 됐다.
1901년 36살의 나이로 프랑스에 유학, 3년간 사립미술학교인 줄리아 아카데미에서 장-폴 로랑스에 사사했다. 이때 정교한 인물 사생에 기초한 역사화 장르를 익혀 평생 역사화와 나체화를 그리는 화가로 자리잡게 됐다. 귀국 이후 메이지미술회의 후신인 태평양미술회에 들어가 중심인물로 활동했으며 태평양미술학교가 개교한 뒤에는 초대교장에 취임했다. 메이지 시대에 주문이 폭주한 역사화 제작으로 화명을 떨치면서 아울러 손에 넣게 된 경제적 여유를 배경으로 중국의 서예 작품을 컬렉션했다. 서예 수집품은 1936에 자택에 서도박물관을 개관하면서 결실을 맺었다.(이 박물관은 1995년 기증을 거쳐 현재 다이토구립(台東區立)서도박물관이 됐다) 박물관 개관 다음해에 72살의 나이로 제국예술원 회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