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야먀 번의 번유(藩儒) 아들. 10살 때 상경해 가와카미 도가이(川上冬崖)의 화숙을 거쳐 공부(工部)미술학교에서 폰타네지에 사사했다. 폰타네지가 귀국한 뒤에 학교를 자퇴하고 아사이 주(淺井忠)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서양화가 단체인 십일회(十一會)를 결성했다.
부친의 친구이자 로마유학 경험이 있던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의 주선으로 이탈리아 특명전권공사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大)의 일행에 포함돼 1880년에 로마로 건너갔다. 자격은 나오히로의 측근인 햐쿠타케 가네유키(百武兼行)의 종자 자격이었다. 로마에서는 햐쿠타케의 영향도 있고 또 로마국립미술학교에서의 수업을 받으며 일본에서 익힌 폰타네지의 바르비종 화풍 대신 로마의 아카데미즘으로 화풍이 바뀌었다. 재학시절 인물화과정에서 최고상을 받기도 했다. 졸업후 파리로 건너갔으나 곧 부친의 부름을 받고 1888년에 귀국했다. 이 무렵 국수주의 영향으로 양화는 공개 장소에 내걸기 힘든 분위기여서 유학파 화가들이 자연스럽게 결집해 메이지미술회가 결성됐다. 메이지미술회에서 주로 활동하며 생계를 위해 공과대학(나중의 동경제국대학공학부)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다. 이후 동경고등공업학교로 옮겨 공업도안과의 과장과 교장을 역임하며 공예교육발전에 크게 공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