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친은 사쿠라 번의 무사이자 번교(藩校) 교장. 번교 세이토쿠(成德) 서원에서 사서오경과 무술을 배웠고 영어를 배우는 한편 번의 남화가로부터 화조화도 익혔다. 1876년 신설된 공부(工部)미술학교에 입학해 폰타네지에게 바르비종 화풍을 전수받았다. 폰타네지 귀국 이후에 학교를 자퇴하고 자연을 대상으로 한 사생을 반복했다. 1889년 고야마 쇼타로(小山正太郎), 마쓰오카 히사시(松岡寿) 등과 메이지미술회를 결성했다. <봄의 밭이랑(春畝)>은 메이지미술회의 제1회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이다. 1898년 동경미술학교 교수로 임명된 2년 뒤에 문부성 명으로 2년간 프랑스에 유학했다. 파리 교외의 전원마을 그레(Grez)의 풍경에 매료돼 수채화를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귀국 후에는 사이가 좋지 않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를 피해 교토로 내려가 교토고등공예학교 교수로 지냈다. 파리시절 경험한 아르누보 양식을 학생들에 소개하며 공예품 도안 등을 그려주는 한편 교토의 전통분위기에 젖어 문인화 제작에도 몰두했다, 또 성호원(聖護院) 양화연구소를 개설해 후진을 양성하면서 간사이(關西)미술원 창립에 관여했다. 뛰어난 교육자 자질을 보여 문하에서 이름난 화가들이 다수 배출됐다. 야스이 소타로(安井曽太郎),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郎),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쓰다 세이후(津田青楓) 그리고 염직공예가인 무카이 간자부로(向井寛三郎)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평생 하이쿠에도 관심이 깊어 메이지를 대표하는 하이진(俳人)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와 친교를 나누며 그가 발행한 잡지 『호토토기스』에 창간부터 죽기 직전까지 삽화를 그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