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오카 번의 번의(藩醫)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번교에서 한학과 영어를 배웠다. 나가오카 번이 정부군에 패한 뒤, 상경해 가와카미 도가이(川上冬崖)의 양화 화숙을 다녔다. 이후 해군병학교 도화과에 조수로 들어갔다. 이 무렵 공부(工部)미술학교가 새로 설립되자 아사이 주(淺井忠), 마쓰오카 히사시(松岡壽) 등과 함께 입학했다. 폰타네지의 지도 아래에서 실력을 발휘해 조교로도 활동했다. 폰타네지 후임으로 온 프로스페로 페레티(Rrospero Ferretti)와는 알력을 빚어 학교를 자퇴했다. 이어 함께 자퇴한 동료들과 십일회(十一會)를 설립했으며 이는 나중에 메이지미술회 창립의 기초가 됐다. 자퇴 이후 새 직장으로 도쿄사범학교의 도화(圖畵) 교사가 돼 현장에서 새로운 미술을 지도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에 출품감사위원이 돼 유럽에 건너갔다. 이때 문부성으로부터 유럽의 미술교육 조사를 명받아 런던으로 건너갔으며 런던에서는 당시 유학 중인 마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같은 하숙을 쓰기도 했다. 이후 문전 등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십일회 이후 설립한 화숙 부동사(不同舍)를 이끌었다. 특히 부동사에서는 미쓰타니 구니시로(滿谷國四郞), 가노코기 다케시로(鹿子木孟郞), 나카무라 후세쓰(中村不折), 아오키 시게루(靑木繁) 등 뛰어난 후진들이 배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