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최초의 일본인 미술상. 엣주 다카오카(越中 高岡, 지금의 도야마현 다카오카시) 출신.
대대로 서양 외과의(外科醫) 명문인 나가사키(長崎)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18살 때 도야마 번의 가신인 하야시 집안에 양자로 들어갔다. 1871년 번 장학생으로 가이세이(開成学校, 에도시대의 창평학문소 후신, 1877년에 동경대학으로 개칭됐다)에 들어가 프랑스어를 배웠다. 1878 파리만국박람회를 앞두고 공예품수출 무역회사였던 기류공상회사(起立工商會社)의 통역으로 파리로 건너갔다. 이후 1905년까지 파리에 머물며 일본미술품 판매상으로 활동했다. 아울러 당시 재패니즘의 열기 속에 일본 문화와 미술을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뛰어난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인상파 화가들은 물론 데오도르 뒤레, 필립 뒤르티, 공쿠르 형제 등의 많은 미술평론가, 언론인, 문인들과 교류했다. 1886년 『파리 일뤼스트레』지의 일본미술 특집호에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에 일본미술을 알리는데 진력했다. 루이 공스의 잡지 『일본미술』의 편집과 에드몽 공쿠르의 『호쿠사이(北齋)』저술에는 기본적인 자료를 제공했다.
파리 최초의 일본인 미술상으로는 수십만 점에 이르는 일본 미술공예품을 판매하면서 성공한 국제적인 미술상인으로 이름이 남겼다. 이런 명성으로 일본이 참가한 만국박람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잇달아 맡았다.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는 심사관,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 때는 평의원으로 참가했으며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는 사무관장이란 대임을 맡기도 했다.
일본의 서양화단에도 후원을 아끼지 않아 메이지미술회 창립에는 찬조회원으로 참가했다. 또 1890년에 열린 메이지미술회의 전람회에는 루소, 밀레 등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작품을 일본에 처음 소개하기도 했다. 이와 함께 유럽 당대미술을 일본에 소개하기 위해 미술관건립 계획을 세우고 많은 작품을 수집했으나 1905년 귀국한 이듬해 병으로 급사하는 바람에 그 꿈은 무산됐다. 당시 수집한 작품이 현재 일본의 여러 미술관에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