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 번의 번의(藩醫) 아들. 메이지 신정부의 공부성(工部省)에 들어간 뒤, 광산학교에 와있던 프랑스 기사에게 프랑스어와 지질학, 식물학을 배웠다. 이후 내무성 지질국, 농상무성 산림국 근무를 거쳐 1884년 정부 파견으로 영국 에딘버러 만국삼림박람회에 참석차 처음 유럽에 건너갔다. 이때 유럽 각국의 삼림을 시찰하면서 농무성을 휴직. 프랑스 낭시 수리임업(水利林業)학교에 입학했다. 2년간 낭시에 유학하며 주변 풍경을 남화풍으로 다수 그렸고 이때 에밀 갈레를 비롯한 낭시파 유리공예가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림은 야마구치 시절 『개자원화전』을 독학한 뒤 현지의 남화가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귀국 후에 산림 행정을 담당하는 한편 산수화 연구에 몰두하면서 정교한 사생에 기초한 참신한 산악 풍경화를 그렸다. 1895년의 일본미술협회전에 <산봉우리의 단풍>을 품해 은상을 받는 등 여러 공모전에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47살 때 공직을 물러나 ‘홋카이(北海)’라는 화호(畵號)를 쓰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이 무렵 화론서 『사산요결(寫山要訣)』를 펴내기도 했다. 1908년의 제2회 문전(文展)부터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대표작으로 <초벽마천(峭壁摩天), 단층협파(斷層夾波)> 쌍폭과 <조선금강산 사제(四題)> <산수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