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조각가로 1876년 공부(工部)미술학교의 조각과 교수로 일본에 왔다.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파르탄나 출신.
일본 서양조각의 아버지로 불린다. 20살 대 이탈리아 통일운동에 참가해 각지를 전전하다 운동이 실패하자 고향에 돌아와 본격적으로 고전 조각을 익혔다. 1872년 밀라노에서 열린 이탈리아 미술전람회에 석고조각을 출품해 최고상을 받으면서 조각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일본 정부의 의뢰로 이탈리아 정부가 실시한 조각학 교수 선발시험에 수석으로 뽑혀 1876년에 신설된 공부미술학교의 조각학 교수로 초빙됐다. 당시 미술학교의 수업 환경은 매우 열악해 프랑스어로 강의하면 외무성 서기가 옆에서 통역해 주었다. 또 조각에 대한 인식도 낮아 조각은 만국박람회에 출품해 인기를 끌면서 상업 제작이 활발했던 상아조각 정도로 받아들였다. 1881년에 열린 제2회 내국권업박람회에 <일본 부인상>을 출품했으나 이때에도 서양 조각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개선되지 않았다. 이듬해 6월 학생 20명에게 졸업장을 수여했으나 곧 세이난(西南) 전쟁 때문에 재정 압박을 받은 정부가 조각학과를 폐지하면서 귀국하게 됐다. 귀국한 뒤에는 미술공예학교를 세워 운영했고 일본인 아내 오타마(お女)는 엘레오노라 오 타마 라구사라는 이름의 서양화가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