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은 한약 약종상. 병으로 오사카미술학교를 중퇴했으며 1937년 한큐(阪急)전철 선전과에 들어가 포스터 디자인 일을 시작했다. 22살 때 구미(汲)로 개명했다. 이 무렵부터 디자이너로 실력을 발휘, 전쟁 중에 군부 선전포스터도 제작했다. 전후 일본화를 배워 재흥미술전에 출품, 입선했다. 1952년 한큐 전철을 퇴사하고 프랑스 유학 길에 올라 그랑 쇼미에르에 다녔다. 이즈음 다부치 야스카즈(田淵安一), 가나야마 야스키(金山康喜), 노미야마 교지(野見山暁治) 등 재불 화가들과 교우했다. 1953년 크라방(craven) 갤러리에서 개최한 그룹전에서 호평을 받으며 크라방 갤러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이후 파리에 정착했다. 동양적인 이국 취향과 추상 표현의 결합으로 유럽과 미국의 주목을 받았으며 인기 작가의 한 사람으로 부상했다. 이 무렵 판화 작업을 시작해 상파울루 비엔날레, 류블리아나 국제판화 비엔날레에 출품했다. 1960년의 도쿄국제판화 비엔날레에는 국립근대미술관 상을 수상했으며 196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수상했다. 1966년 예술선장 문부대신상을 수상. 직접 페라리를 모는 스피드광으로 창에 지나가는 교통표지판을 작업 모티프로 삼았다. 이듬해 교통사고를 당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사고후유증으로 패턴에 의한 작업으로 작품 경향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