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추상미술의 선구자. 전쟁 이후 작가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오모리현 히로사키(引前) 출신.
부친의 육군 기병 소장. 중학 때부터 그림에 흥미를 갖기 시작, 세잔, 반 고흐 등을 모사했다. 1920년 열린 러시아 미래파 전시와 당시 독일에서 귀국해 다다 경향의 작품을 소개한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의 작품과 무대 장치를 접하며 현대 추상미술에 눈을 떴다. 이후 한때 추상미술의 방법론에 고민하며 문학에 경도되기도 했으나 1929년 무렵부터 구성주의와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은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1931년 제작한 릴리프 작품은 회화나 조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과전 출품을 거절당했다. 이 무렵 도고 세이지(東郷青児), 고가 하루에(古賀春江)가 주재하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 들어갔다. 또 이 무렵 시인 다키구치 슈조(瀧口修造)를 알게 됐으며 1936년 이과회에는 첫 입선을 하면서 평생 교우를 나눈 요시하라 지로(吉原治良)를 만나게 됐다. 1938년 야마구치 나가오(山口長男), 요시하라 지로(吉原治良) 등과 구실회(九室會)를 결성했으며 다음 해에는 미술문화협회에 동인으로 참가했다. 전쟁 중에 출판 편집과 공장 직공 생활로 생계를 꾸리던 가운데 대부분의 작품이 공습으로 소실됐다. 1957년 제4회 일본국제미술전(도쿄 비엔날레)에 K씨상을 수상했으며 같은 해 아시히신문 주최의 '오늘의 신인 57년전'에 53살의 나이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매스컴의 각광을 받았다. 195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1960년 구겐하임 국제미술전, 베네치아 비엔날레 등에 잇달아 출품하며 세계적인 지명도도 쌓았다. 1958년에 다키구치의 소개로 긴자 도쿄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였었으며 이를 계기로 전속 작가가 돼 만년에 이르기까지 10번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도쿄 화랑의 야마모토 다카시(山本孝) 사장은 그의 작품을 유럽에 소개, 판매면에서도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64년 다마미술대학 교수로 취임해 1973년 퇴직할 때까지 시키네 노부오(関根伸夫), 고시즈미 스스무(小清水漸), 스가 기시오(菅木志雄) 등 이른바 모노하의 작가들을 다수 지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