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제일은행 상무이사 출신의 뱅커. 부친의 전근으로 소년 시절을 부산, 인천, 도쿄, 나가노, 고베 등지에서 보냈다. 허약한 체질 때문에 일찍부터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20년 도쿄미술학교 입학에 실패한 뒤 가와바타화학교(川端畵學校) 양화부를 2주간 다닌 적이 있다. 이후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다. 부친이 세운 요기기 대저택에 아틀리에도 있어 젊은 시절의 고지마 젠자부로(児島善三郎), 마에다 간지(前田寬治), 미기시 고타로(三岸好太郎) 등이 날마다 아지트처럼 모여 지냈다. 1922년 이과전에 <여인>이 첫 입선했고 1924년에도 <소녀와 정물> 등 3점이 입선했다. 1926년에서 1930년까지 협회에 회원으로 참가해 이후 이과전과 이 협회를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프랑스 유학에 올라 그랑 쇼미에르에 적을 두었다. 프랑스에서도 독자적인 화풍은 버리지 않았다. 파리 시절 살롱 도톤느, 살롱 데 장데팡당에 출품했다. 1931년 살롱 도톤에 <항구의 카페> <벨쿠르 광장>이 나란히 입선했으며 <항구의 카페>는 프랑스 정부가 구입해 일본에도 대서특필됐다. 귀국 후에 이과회 대신 독립미술협회을 택해, 가입한 뒤 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요요기 저택이 폭격에 불타면서 파리시절 제작한 작품을 포함해 약 500점이 재가 됐다. 1952년 일본대학 예술학부 교수로 취임했으며 1964년 마이니치(每日)예술상을 수상했다. 1973년 문부대신상을 수상했으며 1977년 일본예술원 회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