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비즘 화풍 소개의 주역 중 한 사람이며 사실적인 인물화를 다수 그렸다. 돗토리(鳥取)현 출신.
촌장을 지낸 부농 집안의 차남. 중학시절 그림교사 나카이 긴조(中井金三)의 영향으로 그림에 입문했다. 그에게 1년간 그림을 배운 뒤 상경해 아오이바시(葵橋) 양화연구소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도쿄미술학교에 진학했다. 재학 중에 매주 기독교인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에게 설교를 듣기도 했다. 1922년 학교 졸업과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에 적을 두고 구르베의 사실주의를 연구했다. 또 유행중인 에콜 드 파리파의 영향을 받아 주관적 표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중학 동창이자 공산주의 운동가인 후쿠모토 가즈오(福本和夫)를 파리에서 만나 노동자를 소재로 한 그림도 그렸다. 1925년 귀국후 제전에서 연속 특선하며 이름을 날렸다. 또 파리 시절의 동료인 사에키 유조(佐伯祐三), 사토미 가츠조(里見勝蔵) 등과 일본 포지즘 운동의 토대가 된‘1930년협회’를 결성해 활동했다. 그외에 저술에도 힘을 기울였으며 마에다 사실(寫實)연구소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기도 했다. 1929년 제국미술원상을 수상하고 심사위원으로 뽑힌 가운데 비공내종양(鼻孔内腫瘍)으로 급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