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장식성과 상징성이 융합된 새로운 일본화의 세계를 선보인 일본화가. 본성은 후지다(藤田), 이름은 에이이치(榮一). 도쿄 출신.
어려서부터 그림에 관심을 보여 1908년 소학교 졸업과 함께 화가 마쓰모토 후코(松本楓湖)의 안아당(安雅堂) 화숙에 입문했다. 일찍부터 재능을 인정받으며 송원의 고화, 야마토에(大和繪) 그리고 다와라야 소다츠(俵屋宗達)와 오가타 고린(尾形光琳) 등 린파(琳派) 그림의 모사하며 기초를 닦았다. 이곳에서 이마무라 시코(今村紫紅), 우시다 게손(牛田雞村) 등의 동문 선배를 알게 됐다. 1911년 손화회(巽畵會) 출품작이 1등으로 뽑히면서 궁내청이 구입해 이름이 알려졌다. 이해 이마무라를 따라 홍아회(紅兒會)에 들어갔으며 홍화회가 해산된 뒤에는 그가 중심이 된 적요회(赤曜會)에 가입하기도 했다. 1913년 재흥일본미술원 전시로 활동의 장을 옮기며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에게 절찬을 받았고 요코하마의 실업가 하라 산케이(原三溪)의 후원을 받는 계기가 됐다. 1914년 하야미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 성을 바꾸었으며 또 교슈(御舟)라는 화호를 쓰기 시작했다. 1917년 제4회 재흥일본미술원 전시에 출품한 <낙외육제(洛外六題>가 큰 호평을 받으며 약관의 나이로 일본미술원 동인으로 추천됐다. 1926년 가루이자와의 별장 아틀리에에서 대표작 <염무(炎舞)>를 제작, 완성했다. 1930년 이탈리아 정부가 주최하고 실업가 오쿠라 기시치로(大倉喜七郞)가 후원한 로마 일본미술전람회에 요코야마 다이칸과 함께 참가해 이후 유럽 각지와 이집트를 여행했다. 1931년에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일본현대화전에 작품을 출품해 호평을 받았으며 출품작 대부분을 베를린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 화풍은 초기에 이마무라의 영향으로 신남화를 그린 데서 출발해 사실적인 세밀한 묘사에 장식성과 상징성을 가미한 독자적 세계를 펼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