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유명 소고기전골 체인의 창업자. 나중에 소설가이자 번역가가 된 형 쇼타(莊太)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문학에 흥미를 보였다. 중학시절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과 사귀면서 동인지를 내고 소설을 썼다. 그림은 중학 졸업후 형의 허가 아래 백마회의 아오이바시(葵橋)양화연구소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그렸고 이내 화가의 길을 선택했다. 도쿄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두 번 낙방한 뒤 기시다 류세이(岸田劉生)과 사귀게 됐고 이어서 오랜 시간 함께 하며 퓌쌍(fusain)회, 초토사(草土社), 춘양회(春陽會) 등에서 나란히 활동했다. 관동대지진 이후 독자적인 화풍을 모색하면서 영향력이 큰 기시다와 거리를 두었다. 그럼에도 춘양회에는 운영에도 관여하며 마지막까지 작품 발표의 장으로 삼았다. 문필 활동은 퓌쌍회 전시의 작품 발표와 동시에 이뤄져 로댕, 고호 관련 번역물은 물론,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뒤러, 엘 그레코, 세잔 등의 화집을 집필했다. 미술관계 서적으로 『후기 인상파』 『그리스』 『생활과 미술』 『미래파와 입체파 예술』 『근대회화』 등도 저술했다. 중국여행 뒤에는 『대동(大同) 석불사』를 펴내기도 했다. 삽화는 관동대지진 이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해 다수의 신문 삽화를 그렸다. 나기이 가후(永井荷風)의 소설 『묵동기담(濹東綺譚)』의 삽화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만년에는 도쿄 풍속에 깊은 조예를 바탕으로 시대극 영화의 미술고증 뿐만 아니라 『수필 풍속첩』 『도쿄의 풍속』 『도쿄 금석첩(今昔帖)』 『도쿄번창기(繁昌記)』 등을 저서를 발표했다. 사후에 간행된 『도쿄번창기』로 1959년 일본예술은사상(恩賜賞)을 수상했다. 1983년 『기무라 쇼하치 전집』(전8권)이 고단샤에서 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