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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 기시다 류세이 [ 岸田劉生 ]
  •   
생몰년
1891-1929
한자
岸田劉生
이름
きしだ りゅうせい Kishida Ryusei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서양화의 동양전통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부친은 안약을 제조 판매하는 실업가로 영어사전의 편찬에도 관여했으며 신문기자로도 활동했다. 15살 때 도쿄고등사범 부속중학교를 중퇴하고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았다. 1908년 백마회가 설립한 아오이바시(葵橋) 양화연구소에 들어가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에 사사했다. 20살 때 문전(文展)에 입선했으며 이듬해 시라카바(白樺) 동인 주최의 미술전에서 버나드 리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무샤노코지 사네아츠(武者小路実篤) 등과 만나 이후 계속해 이들 동인과 교류했다. 1912년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 요로즈 데츠고로(萬鉄五郎), 사이토 요리(斎藤与里), 기무라 쇼하치(木村荘八) 등과 일본 최초의 포비즘 선언인 퓨상(fusain)회를 결성, 본격적으로 화단에 데뷔했다. 이후 여러 번 화풍이 바뀌는 가운데 초기에는 후기인상파와 세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이후에는 르네상스 화풍 가운데 특히 뒤러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동양 전통회화에 심취하면서 동양적 분위기를 유화로 표현해내고자 노력했다. 어린 딸을 모델로 그린 레이코 초상은 원대 화가 안휘(顔輝)의 <한산습득도>의 영항을 받았다고도 지적된다. 당시 서양화의 일본주의를 모색하던 화가들과 소도사(草土社)와 슌요회(春陽會)를 결성해 활동하는 가운데 결핵에 걸려 가나가와의 구게누마(鵠沼)로 이주해 살았다. 관동 대지진 이후에는 교토로 거처를 옮겨 작품 생활과 함께 골동과 서화를 수집하기도 했다. 1926년 생활을 위해 다시 도쿄로 올라왔고 유럽 유학자금 마련을 위해 만주에 여행한 뒤 귀국길의 야마구치에서 요독증으로 급사했다. 나이 38이었다. 글 솜씨도 뛰어나 사후에 『기시다 류세이 전집』(전10권, 이와나미 서점)이 나왔다.(*)

<레이코(麗子) 입상>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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