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로 미국에 건너가 20세기중반 미국화단 대표화가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화가. 오카야마 출신.
부친은 오카야마의 인력거꾼. 1906년 오카야마 현립공업학교를 중퇴하고 캐나다를 거쳐 미국에 건너갔다. 시애틀에서 청소부 일을 하면서 영어를 익히던 중 그곳 교사가 화가가 될 것을 권유해 화가의 꿈을 키웠다. 이후 LA로 가 로스앤젤레스 스쿨 오브 아트 앤 디자인을 3년 다녔다. 1910년 뉴욕으로 옮겨 인디펜던트 스쿨 오브 아트를 거쳐 아트 스튜덴츠 리그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훗날 휘트니 미술관장이 된 로이드 구드리치와 첫 부인인 캐서린 슈미트를 만났다. 1921년 다니엘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큰 주목을 받았으며 이 무렵 미국의 부호 해밀튼 필드의 후원을 받게 돼 생활이 안정됐다. 1928년 파리 여행에서는 미국인의 시선으로 본 파리 하층사회의 묘사한 작업을 남기도 했다. 1929년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열린 ‘19명의 현대아메리카 화가전’에 선발, 출품했으며 1933년에는 아트 스튜덴츠 리그의 교수로 취임했다. 아트 스튜덴츠 리그에서는 작고할 때까지 교편을 잡았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주변의 도움으로 수용소 격리는 면했으나 육군 정보국에 고용돼 일본을 향한 단파방송과 반전 포스터를 제작했다. 이런 활동이 바탕이 돼 전쟁 이후 1947년에 결성된 아메리카 예술가조합의 초대회장으로 선출됐다. 또 1948년에는 휘트니 미술관에서 생존 작가로는 최초로 회고전이 열렸다. 1952년에는 미국 화가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면서 20세기 중반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활동했다. 1953년 위암으로 사망한 뒤에 뉴욕 근대미술관에서 추도전이 열렸으며 이듬해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도 유작전이 열렸다.(*)